서양인 동양철학 전공자가 본 곤도 마리에 열풍
2019년 2월 25일  |  By:   |  문화, 세계, 칼럼  |  No Comment

지난 주말, 저는 넷플릭스에서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에피소드 하나를 본 후 영감을 받아 옷장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했던 일 가운데서는 그나마 뿌듯한 경험이었지만, “곤도 마리에식 정리 정돈”이 누리는 인기에는 견디기 힘든 구석이 있습니다. 물건이 넘쳐나서 괴로운 우리들에게 집을 정리하면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은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지금의 곤도 마리에 열풍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동아시아 철학을 전공한 학자인 제 눈에는 곤도 마리에 열풍 가운데 매우 익숙한 패턴이 하나 보입니다. 확실하고 평범한 좋은 얘기도 “어딘가 신비로운 동양의 아우라”가 입혀지기만 하면 훨씬 더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는 미국인들의 모습이죠. 곤도 마리에는 불안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자들에게 영화 “가라데 키드”의 미스터 미야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미스터 미야기가 차를 닦는 행위를 정신과 신체의 수련법으로 돌갑 시키듯, 곤도 마리에는 티셔츠 접는 법에서 마법처럼 만족과 기쁨을 찾아내죠. 아주 일상적인 행위가 한 차원 높은 웰빙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미스테리로 남지만, 그 미스테리 자체가 흔한 상식에 매력을 더해줍니다. 정리법으로서 옷 개기는 따분한 일이지만, 신비로운 인생 철학으로서의 옷 개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옷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세상만사 모든 것에 대한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거죠.

동아시아 철학의 대중적인 용법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한적인 것에 확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지혜를 세상 만사에 적용되는 지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중국의 고대 군사 전략가인 손무가 당신의 은퇴 계획을 짜주고, 어린이 축구 교실의 감독 역할을 하고, 결혼 생활을 개선해주고, 아이까지 키워주게 되는 마술이 이렇게 탄생합니다. “손자병법”은 이미 이 모든 문제에 조언을 해주는 자기계발서가 되어 버렸습니다. 얼핏 보기에, 또한 고대 중국의 군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눈에 손무는 무력 분쟁의 해결에만 관심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더 깊이 보면”, 즉 잘 속아 넘어가는 서구의 소비자들에게 팔아보려고 마음을 먹고 보면, 손무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죠. 전시 스파이 행위와 관련된 단순한 지문이 실은 아이들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더 깊은 차원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동양의 지혜”란 절대 한 가지 문제에만 적용되지 않고, 늘 세상만사를 아우르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손자병법”의 만병통치약적 사용보다 더 괴상한 예도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공자가 했다고 알려져있는 온갖 좋은 말들이 바로 그것이죠. “공자가 했던 좋은 말”은 이제 셀 수 없이 많은 밈으로 인터넷 상에 퍼져있고, “공자 왈, 내가 그런 말 안 했다고”라는 메타밈마저 등장한 상태입니다. 공자가 했다는 말들을 떼어놓고 하나씩 살펴보면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도, 흥미롭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말 앞에 “공자 왈”을 붙이는 것이 중요하죠. 그렇지 않으면 “동양의 지혜”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밈들에 등장하는 공자는 그저 인기 있는 고양이짤 속 “신비로운 동양 고양이”일 뿐입니다.

실생활에서 동아시아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저는 “동양의 지혜”라는 딱지가 붙은 문화 현상을 볼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죽어가는 기분을 느낍니다. 대중문화 속 “동양의 신비”를 잔뜩 들이켠 학생들이 매년 더 심오한 동양의 지혜를 찾아 제 수업을 들으러 오죠. 이렇게 기대가 큰 학생들에게 실제로 동양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김빠지는 일입니다.

언젠가 한 미술 박람회의 타투 스티커 부스에서 “Bitch”라는 영어 라벨이 달린 한자 타투 스티커를 본 적이 있습니다. “터프걸”을 지향하는 여성들에게 팔아보려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 한자의 더 정확한 뜻은 “창녀”였죠.

“미스터 미야기류”를 통해 동양 철학에 빠지게 된 학생들에게 동양 철학을 가르치는 건 누군가에게 “너 ‘창녀’라는 뜻의 한자를 문신으로 새겼구나”라고 말해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확하게 아는 게 본인에게도 좋겠지만, 말해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겠죠. 학생들 대부분이 대중문화적 오리엔탈리즘에서 결국은 벗어나게 되지만, 그 과정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곤도 마리에의 주요 타겟은 중년층이니 내 수업을 들으러 오는 대학생들은 적어도 “곤도 마리에 타투”를 새기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죠.

어떤 면에서는 지혜, 하다못해 집 정리 요령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도, 낯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과정이 애초에 문제를 만들어 낸 과정과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새롭고 반짝이는 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욕구와 뭔가 새로운 것이 나의 소비주의적 행태를 고쳐줄 것 같다는 절박한 희망은 곤도 마리에의 고객들이 집 안 가득 물건을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집은 기쁨을 찾아 헤멘 여정의 결과물로 가득 차 결국 기쁨을 잃은 공간이 되고 말았죠. 그리고 “동양의 지혜”는 늘 서구인들에게 이국적인 무언가, 서구에는 없는 “더 의미있는” 무언가를 통해 존재론적 고민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마케팅되어 왔습니다.

확실히 해두건대, 저의 시니컬한 우려는 곤도 마리에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곤도 마리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조언이 굉장히 유용하게 와닿을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제가 멈칫하게 되는 부분은 서구인들이 그녀의 어떤 점에 끌리는가 하는 것이죠. 그녀의 조언과 노하우를 그냥 “미국식”으로 전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꾸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 마음 속 계급의식은 집 정리를 둘러싼 현재의 열풍에 더욱 거부감을 갖게 합니다.

나아가 이국적인 방식으로 중산층을 벗겨내는 곤도 마리에의 “비워내기”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곤도 마리에의 자리에 피곤한 보통의 가정부(가사도우미들은 언제나 피곤하죠)를 넣어봅니다. 그녀가 수 년 간 쌓은 자신의 노하우로 자신을 고용한 부유한 가족에게 너무 많은 그들의 물건을 정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장면을 말이죠. 자신의 경험, 그러니까 두 칸짜리 트레일러에서 한 칸짜리 트레일러로 이사를 갔던 경험 같은 것을 통해 청소의 노하우와 인생의 의미를 한 번에 가르치는 장면을요. (또 하나의 대중문화 현상이었던 “작은 집 운동” 이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이미 트레일러 같은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도 함께 떠올려보세요.) 수 년 간 가족 전체의 시중을 들고, 반짝이는 새 물건 없이도 단촐한 삶을 꾸려온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현자로 거듭난 가정부는 집 정리의 전문가이고, 단순하고도 훌륭한 노하우를 잔뜩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집 청소가 당신에게 행복한 인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겁니다. 또한 그녀는 당신에게 “당신을 설레게 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라고 말하지도 않을 겁니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그 현명한 가정부는 나긋한 목소리로 설렘을 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호하고 꾸밈없는 말투로 당신이 가진 물건들을 평가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거 꼭 필요한 물건 맞아요?”라고 말이죠. 대부분의 물건들은 필요한 물건일 것이고, 필요 없는 물건은 아마 처음 들일 때부터 그랬을 겁니다. 사실 “필요성”은 우리가 물건을 사는 주요 이유가 아닐 겁니다. 쓸모없지는 않지만 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로 집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설레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 모든 것에서 “설렘”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별로 좋은 전략이 아닌 건 아닐까요? 이것 역시도 세상만사에 적용할 수 있는 얘길 겁니다.

(Aeon, Sally Dav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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