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버블 붕괴, 그리고 제국의 역습
2017년 1월 6일  |  By:   |  세계, 정치, 칼럼  |  7 Comments

젠더와 정치에 대해 쓰는 여느 저널리스트들처럼 저도 대선 직전 힐러리 클린턴 당선의 의미를 논하는 글을 의뢰받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여론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근거 모를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저는 명백한 여성주의적 공약을 내세운 클린턴이 당선된 것의 의미, 그리고 클린턴의 승리에 힘을 보탠 여성표의 의미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11월 8일 이후, 다시 꺼내 읽기조차 고통스러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2016년이 가장 높은 유리천장이 부서진 해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던 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2016년은 오히려 페미니즘 버블이 붕괴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국의 유구한 남성 지배가 앞으로도 공고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감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페미니즘은 세상 모든 곳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했습니다. 2014년 비디오뮤직어워드에서 번쩍이는 “페미니스트” 사인을 배경으로 등장한 비욘세의 실루엣에서부터, 소품 취급만 당하던 코미디 프로에서 주인공 자리를 꿰찬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은 대중문화의 핫한 키워드였죠. 여대생들은 캠퍼스 내 성범죄에 맞서 이전 세대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진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불편한 속옷,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이 아닌 편한 옷, 내가 하는 활동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젊은 여성들이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했죠.

젊은 여성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특권층 여성도 피해갈 수 없었던 온갖 불의에 온 몸으로 저항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드는 행위에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대중교통에서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맨스프레딩”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때로는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아래서 지나치게 사소하고 조금은 어이없는 사안들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여성들의 기대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반영하는 현상이었죠. 성평등을 위한 전쟁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제는 뒷정리만 좀 하면 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래는 여성”이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적은 없지만, 그 슬로건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하지 않는 여성도 많고, 자신의 문제를 반드시 여성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트럼프라는 걸출한 인물이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 저는 “남자다움”의 종말이 이렇게 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대선을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남녀 간의 뚜렷한 투표 성향 차이가 드러났고요.

선거를 앞두고 저는 크리스토퍼 캘드웰(Christopher Caldwell)이 20년 전 “위클리 스탠더드”에 기고했던 에세이를 여러 번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미국의 여성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종말론적인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지만, 바로 그 점이 저에게는 즐거운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이제 인종, 종교, 소득 수준이 같은 남성보다 다른 여성들과 공통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아버지, 남자 형제, 남편, 아들보다 다른 여성과 일치하는 이해관계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이제 여성은 하나의 계급이다, 그것도 지배적인 계급”과 같은 구절은 필자의 입장에선 준엄한 경고였겠죠. 물론 이것이 1996년에는 현실이 아니었지만, 2016년에는 곧 다가올 미래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에세이의 처음과 끝이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불평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했죠.

지난 25년 간 클린턴은 “꼴사나운 여성의 야망”의 대명사로 매도되어 왔습니다. 그녀의 선거전이 그토록 파란만장했던 이유입니다. 당선이 되었더라도 그녀는 남성들의 어마어마한 반대에 직면했을 겁니다. 남성들 사이에서 클린턴 지지도가 낮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죠.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그녀는 임금, 육아휴직, 보육지원, 임신중절 등 다양한 부문에서 여성의 권리와 자율성을 증대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을 것입니다. 클린턴의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당선은 성평등을 향한 큰 진전이었을 것이고, 더 큰 진보를 위한 첫걸음이었을 것입니다. 11월 8일 직전까지만해도 이런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죠.

하지만 트럼프의 승리로 인해 이 모든 희망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꿈꿔온 미래는 원천봉쇄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앞으로 어마어마한 퇴보가 일어나 악몽과 같았던 2016년조차도 페미니즘의 황금시대로 보이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여성도 동듬한 시민이라는 간단한 명제마저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버렸죠. 루이지애나 주에서 열린 트럼프 승리 기념 행사에서는 한 목사가 트럼프 취임과 함께 백악관은 “남성은 누가 남성인지, 여성은 누가 여성인지 아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성을 “여성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움직임이 시작될 것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Roe v. Wade)이 뒤집히는 것도 시간 문제일지 모릅니다. 임신중절 수술에 돈을 댄 적이 있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 트럼프가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제하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는 생명, 가족, 성윤리를 앞세우겠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닐겁니다. 그저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고, 여성 개개인의 꿈과 인생 계획은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교육부는 더 이상 캠퍼스 내 성범죄 해결에 의지를 불태우지 않을 것이고,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와 같은 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은 끊길 것이며, 임금 평등과 직장 내 성희롱, 임산부 차별에 대한 연방 정부의 관심도 사라질 것입니다. 성차별적 발언, 가정폭력 혐의 등으로 이미 이름을 알린 트럼프의 주변 인물들이 새 정부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면, 연방 정부 내 여성국은 흔적도 없이 해체되겠죠.

트럼프 당선 후 다시 주목받고 있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1998년 저서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는 독재자 출현 이후 미국의 문화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로티는 “여성에 대한 익살스러운 모욕이 다시 유행하고, 학계 좌파들이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만들어놓은 모든 종류의 사디즘이 되살아날 것”이라며, 어두운 미래를 예고한 바 있죠. 성평등에 적대적이고, 현대의 정치 규범을 무시하는 정부가 출범한다면 우리 삶의 모습도 천천히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캠퍼스의 성범죄 단속이 느슨하지면, 남자 대학생들은 대통령처럼 행동해도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할 겁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죠. 직장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거나, 상사가 성기를 움켜쥐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정부 부처의 수장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할테니까요.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 “정치적 올바름”이 행동을 제한한다며 불평하던 남성들은 다시 내키는대로 행동할 “자유”를 얻게될 것이고, 여성들은 생존 전략으로서의 교태와 아양을 다시 장착해야할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직 지켜봐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수잔 팔루디(Susan Faludi)의 저서 “역습: 선포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전쟁(Backlash: 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는 우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이 책은 레이건 시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했습니다. 당시 다양한 지표에서 여성의 지위는 하락했고, 페미니즘은 오히려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으로 치부되었죠. 여성들은 오히려 “평등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빨리 많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들을 지치게 했다는 것이 당시 논객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새로운 반동의 시기가 오면 어떤 여성들은 이를 수용할 것입니다. 페미니즘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힘들었는데, 남성의 보호로 안락함을 되찾아 편안해진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방카 트럼프처럼 남성지배 사회에 도전하지 않고 타협하는 방식을 터득한 여성들도 있겠죠. 반동의 시대, 여성들은 남성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낼 것이고, 대중 문화는 그런 여성들의 선택을 부추길 것입니다. 팔루디의 말처럼 “규칙을 따르는 여성을 띄워주고, 그러지 않는 여성을 소외시키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이들은 지난 40년 간의 진보를 헛되이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주눅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시대 정신에 반하는 삶이란 늘 힘겨운 법입니다. 우리는 가장 자격을 갖춘 여성이, 가장 모자란 남성에 패배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사건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고,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의 한계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여성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두렵습니다. 딸에게 우리가 “미래는 여성”이라고 믿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장면을 상상하곤 합니다. 딸이 엄마는 어쩜 그렇게 순진했냐며 비웃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슬레이트)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