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성혐오의 부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첫 걸음입니다
2016년 8월 9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영국의 언론인,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조안 스미스(Joan Smith)가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여성혐오는 바이러스와도 같습니다. 첫째, 70년대 말 요크셔 리퍼 살인사건 때 실감한 바와 같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고, 둘째, 돌연변이를 일으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썼던 책 제목도 복수형인 “여성혐오들(Misogynies)”이었죠. 셋째, 전염성이 높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까지 여성들의 삶을 힘겹게 만듭니다.

최근의 사건들을 돌아볼까요? 지난 6월에는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인생을 살았던 노동당 소속의 여성 의원 조 콕스가 자신의 지역구에서 총과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일에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분노와 충격, 슬픔을 쏟아냈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노동당 당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오웬 스미스가 보수당 소속 테레사 메이 총리를 공격하면서 하이힐 운운했을 때는 귀를 의심했죠.

스미스의 무심한 단어 선택은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던 여성들에게만 상처를 준 것이 아닙니다. 여성 의원 안젤라 이글은 노동당 당대표 도전에 나선 이후 사무실 창문으로 벽돌이 날아들고, 살해 협박 편지를 받는 등 각종 수난을 겪었습니다. “조 콕스처럼 당해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식칼이 배달되자, 이글 의원은 경찰에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죠.

여성혐오가 이처럼 끓어오르고 만연했던 시절을 떠올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제가 1989년에 “여성혐오들”을 펴냈을 때만 해도, 저는 이것이 앞으로 사라져갈 무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썼던 당시 저는 무려 13명의 여성이 살해당한 요크셔 리퍼 연쇄살인과 이를 수사했던 경찰의 무능함에 분노한 상태였습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면서 저는 여성혐오라는 것이 고대 로마의 시 구절에서부터 오늘자 타블로이드 3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는 유구한 전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강화되고 있었고, 여성들에게도 다양한 직업 선택의 기회가 열리고 있었죠. 마녀사냥이나 노예제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쓴 지 20여 년 만에 IS 점령지역 노예 시장에서 소녀들이 거래되는 모습,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나이지리아 소녀들이 단체로 납치당하는 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오늘날 여성혐오는 경기 침체와 경제적 불확실성, 종교적 극단주의의 물결을 타고 다시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여성이 총리 관저를 차지하자 곧장 “운동선수풍 여성혐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선(Sun)” 지는 “힐이다, 남자애들아(Heel, boys)”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총리의 구두 아래 남성 장관들의 사진을 실었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라고요? 수십 년 전 대처 장관도 이런 시선에서 예외가 아니었죠. “여성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 을 “남성의 수치”와 연관짓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여성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이 여성혐오에 오히려 기름을 끼얹은 듯한 현실은 비극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노리게 되자, 공화당 전당대회는 “힐러리를 감옥에 가두라”는 마녀사냥식 구호로 점철됐습니다. 이글의 용감한 당권 도전 역시, 노동당원들이 훨씬 경력이 짧은 스미스를 선택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글의 선거 운동이 약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녀의 사무실로 걸려오는 욕설과 협박 전화가 너무 많아 전화선을 끊어놔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여성혐오의 뿌리는 매우 깊습니다. 때로는(주로 경기가 좋을 때) 잠복기를 거치기도 하지만, 아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여성혐오를 단순한 학대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은 제한적인 시각입니다. 사적인 영역의 개인적 관계에서 형성된 증오가 종종 공적 영역으로 흘러넘쳐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인종차별주의의 피해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부분의 여성혐오자는 여성과 결혼을 하지요.

이 문제에 단호한 불관용 입장을 취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성혐오를 조금이라도 문화적으로 용인하면, 이는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갑니다. 한 여성 유명인사가 트위터에서 강간 협박을 받기 시작하면, 수 백 명이 이 공격에 가세합니다. 조금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IS가 점령한 이라크와 시리아의 일부 지역에서 강간을 금지하는 법이 폐지되니, 14세 소녀와 강제적인 성관계를 꿈꾸는 지원자들이 몰려들게 되는 겁니다.

여성혐오는 정치가 양극화되었을 때 더욱 힘을 얻습니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과는 대척점에 있는 좌파 역시 여성혐오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줄리안 어산지가 스웨덴에서 성폭행 혐의를 받았을 때 그를 감싸기 위해 달려들었던 “진보” 남성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다음날, 그림자 내각의 가장 중요한 세 자리는 남성에게 돌아갔습니다. 급진 좌파가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화력을 분산시킬 뿐인 페미니즘에 립서비스 이상의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들로서는 놀랄 일도 아닙니다. 노동당 역시 여성 의원들에게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 의원 45명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괴롭힘과 비방에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서한을 코빈 대표에게 보내기도 했죠.

이런 상황은 분노와 함께 기시감을 자아냅니다. 역사 속에서 세계 각지의 여성들은 오늘날 다시금 위기에 처한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오늘날 다시금 폭발하고 있는 여성혐오 풍조에 부끄럼없이 동참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불쾌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여성혐오가 별 것 아니라며 물타기를 하는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조 콕스 의원 살해 이후에도 여성 의원들에 대한 살해, 강간 협박에 대해 “징징대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놀라울 뿐입니다.

여성혐오는 구시대의 악습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혐오는 분명히 부활했고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당신이 뭘 아느냐고 설교할 생각은 마세요. 다른 주제라면 몰라도 여성혐오에 대해서 나는 말 그대로 책 한 권을 쓴 사람이니까요.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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