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선 후보들에게 인기가 높은 집권 마지막 해 대통령 오바마
오는 2월 1일 아이오와 코커스를 앞두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펼쳐진 민주당의 마지막 대선후보 TV 토론회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마틴 오말리 후보와 버니 샌더스 후보로부터 안건마다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클린턴이 현재의 선두 자리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토론 내내 꼭 붙들고 놓지 않은 이름이 있으니 바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습니다.
토론이 열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8년 전 당시 오바마 후보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클린턴으로선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클린턴은 더욱 간절하게 자신이 오바마의 정책을 계승할 적임자이자 오바마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후보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주요 현안과 관련해 클린턴이 오바마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만 추려도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 오바마 대통령은 도탄에 빠진 우리나라 경제를 대공황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이란 핵 협상: 저는 대통령의 최대 외교 성과 가운데 하나인 이란 핵 협상에 이바지할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발했을 때 아사드 정권을 어떻게 처리할지, 특히 시리아 반군에 물자를 지원하고 이들을 훈련시킬지를 두고 당시 국무장관으로서 오바마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음에도 이 문제 역시 오바마의 치적이었다고 치켜세웠습니다.
한마디로 토론 내내 클린턴은 오바마라는 카드를 끊임없이 꺼냈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공격받을 때는 오바마와 자신을 한편으로 묶는 식으로 예봉을 피했고, 다른 후보에게 반격을 가할 때도 오바마를 부정하겠느냐, 오바마에 대해 했던 비판에 대해 해명해보라는 식으로 창을 들이댔습니다.
지난 몇 주는 클린턴 지지자들에게는 썩 달갑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8년 전 지명도가 훨씬 낮던 오바마라는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해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까지 당선되는 과정에서 이변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던 때와 비슷한 양상이 몇 가지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당내 주류도 아닌 인물이 자꾸 외부로부터 바람을 일으키며 특히 젊은 층, 특히 더 진보적인 유권자들로부터 열성적인 지지를 끌어모으고 도전장을 내밀려는 형국이 된 겁니다. 같은 방법에 두 번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오바마 카드를 적극적으로 꺼내 든 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해 보입니다.
다만 지금의 샌더스 바람은 분명 8년 전의 오바마 열풍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젊은 유권자, 진보적인 백인 유권자, 그리고 무엇보다 흑인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오바마에 비하면 샌더스의 지지층은 그때보다는 얕고 좁은 편입니다.
20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 투표의 출구조사를 보면, 투표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흑인 유권자였습니다. 이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흑인들의 표심을 잡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뜻인데 클린턴은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샌더스를 견제한 겁니다.
토론 중 클린턴 후보는 두 차례 인종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흑인 남성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평생 한 번은 감옥에 가게 된다는 통계를 들며 클린턴은 말을 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한 번 같이 생각해봅시다. 만약 이 통계 수치가 흑인 남성이 아니라 백인 남성이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를 말입니다.”
이어 주민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들인 미시간주 플린트의 수돗물에서 납 성분이 검출됐던 일을 상기시키며 인종에 따른 이중잣대를 비판했습니다.
“만약 납 성분이 플린트가 아니라 부유한 백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디트로이트 교외의 어떤 동네에서 검출됐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각적인 조치가 뒤따랐을 겁니다.”
월요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앞두고 열린 토요일 밤 행사 자리에서부터 클린턴은 오바마에 대해 입이 닳도록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찰스턴의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목사와 신자 9명이 총기 난사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장례식에 참가한 오바마 대통령이 했던 역사적인 연설을 다시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갑자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저는 진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어요. 동시대를 산 우리 모두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샌더스가 주장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계획에도 클린턴은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비판의 요지는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내내 가장 애를 써서 간신히 이룩해놓은 건강보험 개혁법안(Affordable Care Act)을 다시 물거품으로 바꾸어놓을 생각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건강보험 개혁법안은 오바마 대통령의, 우리 민주당의, 미국 전체가 이룩한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현재의 건강보험 관련 법안에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다시 다 백지화하고 건강보험 법안 자체를 처음부터 쓰겠다는 주장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샌더스 후보는 즉각 반박했습니다. 오바마가 이뤄놓은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무위로 돌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클린턴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건강보험과 관련해 전면적인 새 법안을 도입하고 제도 자체를 손보겠다는 것이 바로 현재의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위라며 (특히 오바마를 비판하는 공화당 쪽에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쓰곤 하는) “오바마케어”라는 단어까지 직접 언급하며 이를 변호했습니다.
“지난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가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철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미국인을 위해 오바마케어를 지켜낸 것입니다.”
청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뒤따랐습니다.
샌더스가 클린턴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사안 가운데 하나가 클린턴과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이 너무 가까워 필요한 금융 규제를 못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클린턴은 이번 토론에서 샌더스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데도 오바마를 활용했습니다.
“(월스트리트와 관련해) 저를 향한 샌더스 후보의 비판은 사실 저뿐만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과도 다름없습니다. 거대 금융 기업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 이는 오바마 대통령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바마가 누구입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들 아시다시피 역사적인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 아닙니까? 샌더스 후보는 지난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했다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경선에 도전할 뜻을 비치기도 했습니다.”
(옮긴이: 미국 대통령직은 한 번 연임이 가능합니다.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해당 정당은 경선을 치르지 않고 현직 대통령을 후보로 추대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클린턴은 엄밀히 말하면 민주당 소속도 아닌 샌더스가 2011년 이렇게 잘한 것이 많은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가로막으려 했다고 비판한 겁니다.)
클린턴은 금융 개혁에 관한 견해를 이어갔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 법제화한 도드프랭크 법안은 1930년대 이후 우리가 만들어 낸 가장 훌륭한 규제 법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드프랭크 법안을 지켜낼 겁니다. 이를 만들어 낸 오바마 대통령도 불필요한 비난으로부터 지켜내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금융권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발로 뛴 결과 이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노력은 반드시 인정받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토론을 벌이는 상대가 클린턴인지 오바마인지 헷갈렸을 법도 한 샌더스 후보는 자신도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하고 좋은 친구라는 점을 강조한 뒤, 그런데도 클린턴 후보는 대형은행을 비롯한 금융권과 지나치게 유착되어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여전히 필요한 개혁을 추진할 적임자가 아니라고 한 것이죠.
이번에도 클린턴은 오바마를 활용해 이를 맞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오바마 정권에서 4년 동안 국무장관을 지냈다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2011년에 오바마를 그렇게 비판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말씀을 하시는군요. 대통령이자 최고 통수권자는 끊임없이 자신이 내린 결정을 되돌아보고 평가하며 다음 결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상황실에서 대통령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이것이 어떤 것인지 몸에 익히고 배웠습니다.”
오바마와 클린턴이 엎치락뒤치락했던 2008년 경선 당시 클린턴 후보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거둔 오바마의 승리를 애써 깎아내렸습니다. 제시 잭슨 목사도 두 차례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전국적으로는 의미 있는 표를 모으지 못했다면서 말이죠. 이를 고려하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하는 힐러리 클린턴의 모습은 언뜻 놀랍기도 합니다.
하지만 클린턴은 분명 8년 전 경선의 교훈을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흑인 유권자들을 향해 오바마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자신을 알리고 또 알렸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클린턴은 오바마를 지칭할 때 항상 이렇게 불렀습니다. “우리의 대통령(our president)”이라고.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