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기자 수첩] 시대에 뒤쳐진 UN 평화유지군에게 찾아온 정체성 위기
2015년 9월 22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UN을 출입하는 <뉴욕타임스>의 소미니 센굽타(Somini Sengupta) 기자가 UN 평화유지군이 회원국들의 비협조 속에 갈수록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최근 잇따라 불거진 작전 실패와 스캔들이 위기론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단 다르푸르에서 UN 평화유지군은 정부가 주도한 민간인 학살 증거들을 은폐했습니다. 이들이 숨기려던 수단 정부의 범죄 목록 가운데는 심지어 UN군을 향한 공격도 있습니다. 반군과 테러 조직이 장악하고 있는 말리 북부 사막지대에서는 지난 2년 동안 무려 42명의 평화유지군이 숨졌습니다. 대부분 UN을 상징하는 푸른색 전투모를 쓰고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공격을 받아 숨졌습니다. 이 때문에 말리에서는 UN 평화유지군 주둔지에 기본적인 물자를 보급하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골란 고원에서는 UN군이 철수한 지역 대부분이 알카에다 연계 조직들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UN 평화유지군 병사들이 일으킨 성범죄 추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최근 문제가 된 굵직한 현안들만 나열해도 이렇습니다. UN 창설과 함께 활동을 시작한 이래 계속 몸집을 불리며 역할을 확장해 온 평화유지군과 평화유지 업무 전반은 전에 없는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20년 전 르완다,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의 끔찍한 인종 청소와 민간인 학살을 막는 데 실패한 뒤 UN 평화유지군의 역할과 능력에는 계속 의문 부호가 붙었습니다. 특히 지구촌에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지역은 유지해야 할 평화의 씨앗조차 찾을 수 없는 끔찍한 내전 지역, 테러리스트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인데 과연 여기서 지금과 같은 체제로 운영되는 UN 평화유지군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지난주 발표한 평화유지 업무 개혁안을 보면 현재 시스템이 안고 있는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평화유지군이 “더 빨리, 더 큰 책임감을 갖고 분쟁 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체제를 개편하고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게 골자였습니다. 직접 특정 대상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반 총장은 UN이 분쟁에 보다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잇따라 일어났는데도, 강대국들 사이의 견해 차이와 그로 인한 분열 때문에 평화유지 업무가 차질을 빚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평화유지 업무에 투입되는 예산은 82억 7천만 달러. 이 가운데 1/4 이상을 부담하고 있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최근 몇 달 동안 평화유지 업무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라고 각 나라를 설득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더 많은 나라로부터 더 많은 병력을 지원받으면 UN이 분쟁 지역에 더욱 신속히, 효과적으로 병력을 투입해 임무를 지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미국 관료는 “UN이 각 회원국에 더 많은 병력을 좀처럼 요구하지 못한다”며 일종의 “주어진 자원을 갖고 어떻게든 문제를 불평 없이 해결해야” 한다는 정서가 UN에 팽배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달 UN 총회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평화유지 업무에 힘을 실어주자는 의제를 적극적으로 설파할 계획이며, 여러 회원국에 평화유지군 지원을 늘리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돈과 물자는 열심히 지원할지 모르지만, 평화유지군에 파견한 군인 숫자는 가장 적은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 UN 평화유지군 가운데 미국에서 파견된 군인, 경찰관은 80명이 채 안 됩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에티오피아, 르완다 등 개발도상국이 평화유지군 병력의 대부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은 UN의 강대국들, 특히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불만이 많은데, 자국 군인들은 좀처럼 투입하지 않은 채 평화유지군을 분쟁 지역에 보내놓고 총알받이 취급하면서 작전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70년 전 처음 창설된 UN 평화유지군은 군대라기보다는 외교적 중재 역할을 주로 하던 사절단에 가까웠습니다. 주된 업무도 직접 전투를 치르거나 누군가를 보호하는 업무보다는 분쟁 지역 당사자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참관 역할을 하는 식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총 12만 4천여 명의 병력이 현재 16개 분쟁 지역에서 평화유지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남수단에서처럼 UN 평화유지군의 주둔과 활동이 무고한 민간인들의 목숨을 살려낸 사례도 있습니다. 반대로 대단히 비효율적인 운영 탓에 있으니만 못한 경우도 있고, 오히려 평화유지군이 범죄를 저질러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우선 UN 평화유지군의 군사 장비는 현대 군대의 기준에 비추어봤을 때 상당히 열악합니다. 통신용 무전기나 수송용 장갑차도 제대로 없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말리에서 평화유지군은 테러 조직과 반군이 설치해 놓은 사제폭발물(improvised explosive devices)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정부군이 평화유지 업무를 달갑게 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단의 경우가 그러한데, 다르푸르에서 UN군은 정찰 업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수단 정부군에게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분쟁 당사자들의 화해를 중재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민간인을 보호하는 게 주된 업무지만,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수단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축소 보고했고,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평화유지군이 민간인 학살, 성폭행 등 범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아이티에서는 평화유지군이 콜레라균을 가져와 최대 8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UN은 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UN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군인들이 성범죄를 저질러 잇따라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1988년 노벨 평화상까지 탔던 UN 평화유지군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반기문 총장은 “분쟁이 워낙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일어나며 빠르게 퍼지기 때문에 평화유지 업무가 전에 없이 힘들어졌다”고 인정했습니다. 반 총장의 임기는 내년이면 끝이 납니다. 본격적인 개혁은 다음번 사무총장의 임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반기문 총장은 상임이사국들에 평화유지군 임무를 짤 때 병력을 파견하는 나라와 충분히 협의하고, 평화유지군을 보복테러 공격에 동원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당부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리비아나 시리아 등 심각한 교착 상태에 빠진 지역에 UN군 투입을 고려하던 상임이사국들은 분명히 달가워하지 않을 요구입니다.

반 총장은 병력을 파견하는 국가들도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주둔 지역에서 성폭행을 비롯해 범죄를 일으키는 군인들을 엄중히 처벌하지 않으면 해당 병력을 본국으로 철수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장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난 성범죄 피의자들에 대한 자체 조사와 사법처리 문제가 회자될 때마다 UN 평화유지군의 정체성 문제는 계속해서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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