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인간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 초 인류에 대한 두 권의 책
2014년 8월 26일  |  By:   |  과학, 문화  |  3 Comments

인간은 유사이래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꿈을 꿔 왔습니다. 신화속 주인공들은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자연을 마음껏 부렸으며 20세기 만화에 등장한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 맨 등의 슈퍼 히어로들 역시 인간이 가지지 못한 능력들을 뽐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전공학과 뇌과학은 인간에게 현실적인 초능력을 부여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SF 소설가만이 아니라 철학자와 생명윤리학자들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명의 부모가 있는 가족, 유전자 맞춤형 아기, 스마트 약물 등의 기술들이 이런 논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곧 나타날 것이라 주장하는 초인간주의자(transhumanist)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의 대표 격인 미국의 발명가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생명과학과 IT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21세기 중반에는 유전적으로, 그리고 뇌과학적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현명하고, 도덕적이며, 장수를 누리게 될 새로운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물론 인간의 역사는 곧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켜온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도르래와 지렛대는 인간의 근력을 강화시켰습니다. 자전거, 자동차, 배, 비행기는 인간의 이동속도와 물건을 옮기는 능력을 강화시켰고 망원경과 현미경은 우리의 시력을, 창과 총, 핵무기는 우리의 살상능력을 강화시켰습니다. 철학자 니콜라스 아가(Nicholas Agar)는 자신의 새 책 “진정한 인간 강화(Truly Human Enhancement)”에서 이들을 “외부 강화”라고 부르며, 우리에게 그다지 큰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강화가 인체 내부로 들어올 때, 곧 청각장애자들이 달팽이관을 이식할 때, 또는 전쟁을 위해 군인이 신경보조장치를 달게 될 때, 이들은 외부강화와 내부강화의 경계에 있게 되며, 우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치료 행위 역시 어느 시점부터는 이런 인간의 강화라는 오해를 사게 됩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ADHD 아동의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각성제 리탈린(Ritalin)을 시험을 잘 치기 위한 목적으로 복용합니다. 윤리학자들은 이를 ‘경쟁적 우위를 위한 강화’라고 부릅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을 때, 학생들은 대부분 리탈린을 먹는 것이 부정행위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같은 수업의 다른 이들이 이 약을 먹는다면 자신도 먹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결국 모두가 이 약을 먹게된다면 누구도 경쟁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한편, 자신의 아이에게 시험을 위해 이 약을 사주는 것과 시험을 대비해 비싼 개인교습을 시키는 것 사이에 과연 어떤 도덕적 차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유전자를 이용해 아이의 학습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가의 동료 철학자 러셀 블랙포드(Russell Blackford)역시 이 문제에 대해 지난 해 “강화된 인류(Humanity Enhanced)”라는 책을 낸 바 있습니다. 이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며, 흥미롭게도 결론 역시 다릅니다. 그들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의 같은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유전자 조작기술과 신경-컴퓨터 연결에는 실질적으로 한계가 없다는 것,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 지위, 권력의 차이가 우리를 구속해서는 안되는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이며 우리의 선택이 계층, 인종, 성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그런 보편적인 도덕원칙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하에서 많은 생명윤리학자들은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아가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SF 영화에서 많은 예를 가져옵니다. 그는 커즈와일 식의 환상에 반대합니다. 입센의 “민중의 적(An Enemy of the People)”에 나오는 곤란에 빠진 부르조아처럼 아가는 절제된 강화만을 지지합니다. 이는 곧 상식적인 강화를 의미하며, 즉 인간의 수명이 120살이 되는 것은 좋지만, 500살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500살까지 살 수 있다면, 그들은 인류가 아닌 “후-인류(post-people)”라고 불려야 할 겁니다.

그가 이를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먼저, “후-인류”를 위해서는 비윤리적인 인간실험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번 “후-인류”가 만들어진다면, 이제 그들은 기존의 정상적인 인간을 마치 우리가 현재 동물을 대하듯 열등한 족속으로 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지능이 향상된 다른 “후-인류”가 등장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논리에도 헛점은 있습니다. 그가 사용한 ‘정상적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실은 명확하지 못한 개념입니다. ‘정상적 인간’은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30살이던 우리의 선조들은 대부분 100년 가까이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볼 지 모릅니다. 또 지난 100년간 인류의 지능은 계속 올라갔습니다.

아가의 이런 염려에 대해 블랙포드의 의견은 단호합니다. 유전자 공학에 대해 그는 태아(embryo)의 권리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나 줄기세포연구에 있어 여성의 신체가 연구대상으로 전락한다는 페미니즘적 관점을 모두 거절하며, 유전자 공학이 인류에 실제로 해를 끼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또한, 유전자공학이  인간 유전자 풀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변화를 반겨야 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는 또 독일의 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펼칩니다. 하버마스는 칸트의 정언명령인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한다’에 기반해 인간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의 자율성(autonomy)을 해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 하버마스는 아이들은 열린 미래를 가져야 하며, 아이들이 과학이나 특정한 분야에 재능을 가지도록 유전적으로 조작된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인생과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블랙포드는 간단하게 답합니다.

“어떤 자율성 말인가?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이상적인 열린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들을 음악가, 체스선수, 테니스 선수로 키우고 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과 태어나기 전 그런 유전자를 주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나?”

곧이어 블랙포드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것은 곧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입니다. 강화된 인간은 그렇지 못한 인간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그 사회는 신분사회(hierachical society)가 될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서도 안심이 되는 답을 줍니다. 곧, 오늘날의 진보적 민주주의사회도 이미 어느 정도의 신분사회이지만, 동시에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자본주의가 과도한 격차를 야기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술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입니다. 그는 심지어 복제인간에 대한 연구조차도 이를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적 제제는 꼭 필요할 때에만 제한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권의 책의 단점은, 그들이 가정한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이 다소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만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이나 자신의 아이들을 강화시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여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효과를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수이 인간이 강화되기 위해 사회의 다수가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자율성의 기회를 이야기하기 앞서,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삶의 기회를 찾아주는 것을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강화만큼이나 사회의 강화도 필요합니다. 생명윤리학자들이 개인의 윤리 못지 않게 공공의 윤리에도 관심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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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왕

    “비이성적인 공포”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 strangerlook

    공포에 대한 공포가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이라는 지성사회의 낙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말 필요한 경계심 조차 가지지 않는 것을 오히려 지식인의 표징 정도로 여기는 것이죠. 정말 찌질한 사이비 지성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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