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2014년 2월 18일  |  By:   |  과학  |  4 Comments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식량으로, 의복으로, 그리고 유희의 대상으로 이용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로 종종 인간의 지적인 우월성과 인간만이 가진 언어와 자의식을 이야기합니다. 이 논리는 곧, 더 뛰어난 존재는 더 약한 존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의 확장된 형태입니다. 그러나 IMDB에서 평점 8.5점을 받은 마크 드브리스의 다큐멘터리 “종차별주의(Speciesism)”는 이 논리를 정확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LA 의 한 극장을 메운 동물애호가들은 프린스턴 대학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주장에 환호를 보냈습니다. 영화에서 싱어와 드브리스는 몇몇 동물들은 갓난 아기, 혼수상태에 빠진 인간, 정신지체자들보다 더 뛰어난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드브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동물의 이익이 인간의 이익보다 덜 중요하다는 가정은 마치 인간을 피부색깔별로 나누었던 편견과 같은 종류의 것이며, 우리는 이를 종차별주의(speciesism)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종차별주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고기를 아주 좋아하고 가죽이라는 소재도 좋아합니다. 오늘날 동물들이  “홀로코스트”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 동물애호가들의 비유를 듣는 것도 불편합니다. 역사학자 찰스 패터슨은 자신의 책 “영원한 트레블린카”에서 이 비유를 사용했고 드브리스 역시 오늘날의 공장형 사육장을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문제는 가해자의 동기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을 썼던 사람으로써 나는 축산업자와 나치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축산업자들이 비록 이윤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히믈러와 아이히만이 가졌던 악한 동기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이 공장형 사육장과 수용소의 비교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1978년 실험심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실험이 끝난 쥐들을 직접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나는 클로로폼을 사용해 이들을 안락사 시켜야 했고,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다른 동물에 잡혀먹히거나 굶어죽는것이 개스를 마시고 죽는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고, 이들을 뒷산에 데리고 가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실험실의 동물들을 야생에 방류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고,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이때 내가 저질렀던 일들은 여전히 내가 가진 기억 중 가장 끔찍한 기억입니다.

그러나 동물애호단체인 freefromharm.org 의 안타까운 영상들은 내가 직접 경험한 이 이야기보다도 훨씬 더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3분짜리 한 영상은 “슬픈 도살장(saddest slaughterhouse footage ever)”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좁은 복도에서 줄을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황소를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이 죽임을 당하는 소리를 듣고 뒷걸음질 치지만 일꾼은 이들을 전기봉으로 지져 앞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한 황소는 비좁은 복도에서 도망쳐 보고자 몸을 틀려 하고, 이를 위해 고개를 열심히 돌리려 노력합니다. 그는 분명히 두려움에 질려 있습니다. 다시 일꾼은 그를 어두운 방으로 집어넣고, 우리는 곧 그의 뒷발이 힘없이 꺾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한낱 동물에게 너무 인간적인 감정을 불어넣고 있나요? 그러나 고기공장의 한 일꾼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죽고싶어 하지 않아요.”

동물은 삶을 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는 모든 생명체에게 삶과 번식과 번영의 본능을 부여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도덕의 영역을 인간을 넘어 확장해야 합니다. 진화생물학이 밝혀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유전적 계보는 이 확장을 위한 과학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Scientific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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