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려고 노력해보세요. 더 행복해질 겁니다.
24년 전 이맘 즈음 저와 제 아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2주 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자 저는 스페인 처가에 미국식 추수감사절 만찬을 준비해 미국 문화를 전도하는 글로벌한 사위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칠면조를 구하기 어려워 프랑스에서 특별 주문했는데, 털조차 제대로 뽑혀있지 않았습니다. 오븐은 칠면조를 굽기에 너무 작았고, 모두 크랜베리가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저녁 식사 중에 처가 식구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죠. “이 괴물은 무얼 먹고 이렇게 큰 겁니까?”, 철학적인 질문도 있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도 이 명절을 축하해야 합니까?”
저는 마지막 질문에서 멈칫했습니다. 그때 저는 감사를 나누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가식일 뿐이죠. 속물적이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위선은 누구나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틀렸습니다. 최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반드시 진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에 대항하고 그렇게 느끼지 않을 때조차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감사한 것처럼 행동하는 과정에서 진짜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인생이 어려울 때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란 어렵습니다. 꼭 우울증이나 스트레스에 짓눌려있지 않더라도 감사함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란 수도 없이 많죠. 명절 때마다 술에 취해 정치적 견해를 떠들어대는 삼촌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겁니다. 감사하기는 무엇에 감사하란 말입니까?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쉽게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4년 <사회적 인지와 정서 뇌과학>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감사함을 느끼는 유전자(CD38)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인간관계 만족도, 상대방의 반응 인지와 긍정적 감정, 특히 사랑을 느끼는 정도가 유전적으로 정해진다는 겁니다. 그 말인즉슨 항상 긍정적인 당신 주위 사람은 단순히 돌연변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감정, 상황, 유전자의 노예가 되지는 맙시다. 우리 스스로 감사하는 태도를 키우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자기계발에 매진하라는 뻔한 소리가 아닙니다. 2003년 연구에서는 실험 대상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는 감사한 일을, 다른 집단에는 힘들었던 일을 매주 적도록 했습니다. 10주 뒤, 감사한 일을 적었던 집단의 인생 만족도가 훨씬 높았죠.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결론이 나온 연구는 많습니다. 그러니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면, 추수감사절 내내 실제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세요.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행복한 척하는 행동이 뇌를 속여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1993년 한 연구에서는 20초 동안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짓고 있으면 특히 눈가의 잔주름이 생기는 원인이기도 한 눈둘레근육을 자극해 실제로 긍정적인 감정이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죠. 미친 사람처럼 억지 웃는 얼굴을 짓고 있는 게 불편하다면, 감사함을 표현해보세요. 신경과학 학술지 <대뇌피질>에 오른 연구에 따르면, 감사함을 표현하는 행위는 스트레스를 담당하는 시상하부와 보상회로와 관련이 있어 즐거운 감정을 담당하는 복측 피개부를 자극합니다.
굳이 과학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얘기해도 이해가 갈 겁니다. 좋은 일을 떠올리면 나쁜 일을 떠올릴 때보다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감사를 표하는 것은 나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 외에 주위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교 연구진이 2011년 권력을 쥐고 있지만, 감정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당신 인생에서 최악이었던 상사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면 공격적인 반응을 표출하고 자학을 시작했죠. 그러나 주위에서 감사함을 표현해주면 나쁜 행동이 줄어들었습니다. 성난 상대방을 무장해제하는 방법은 “고마워요.”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겁니다.
저도 10년 전 이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그때 저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수십 명이나 읽어줄까 말까 한 복잡한 논문과 책을 쓰고 있었죠. 교수로서 정년을 보장받고 나서 자선에 대해 쓴 책이 어찌어찌하여 인기를 끌었습니다. 졸지에 TV나 라디오에도 출연하게 됐고, 사람들은 제게 이런저런 감상과 평가를 보내왔죠. 어느 날, “브룩스 교수님, 당신은 사기꾼이에요.”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는 단원별로 무엇이 틀렸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인 예를 들어 비판했습니다. 긴 메일을 읽는 동안 저는 화가 나기는커녕 누군가 제 책을 꼼꼼히 읽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답장을 썼죠. 그가 지적한 부분 몇 가지에 반박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시간과 공을 들여 읽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쓰면서 기분이 좋았고, 거의 바로 다시 온 답장도 친절한 투로 바뀌었습니다.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 나쁜 점도 있긴 할까요? 음, 일단 살이 찔지도 모릅니다. 감사함을 표현하라고 요구받을 때마다 단 것이 당긴다는 연구결과가 있었거든요. 이 연구를 호박파이의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몸무게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실제로 어떻게 느끼든 관계없이 11월 추수감사절에 즈음할 때뿐만 아니라 일 년 내내 가급적 많이 감사를 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먼저, ‘내적인 감사부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고마워하는 거죠. 그다음에는 공개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외적인 감사’로 넘어갑니다. 긍정 심리학의 아버지인 마틴 셀리그만은 그의 베스트 셀러 <진정한 행복>을 통해 몇 가지 조언을 합니다. 먼저 체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모닝커피처럼 일상의 주기로 만드세요. 매일 아침 친구들, 가족, 동료에게 고맙다는 이메일을 짧게 두 통씩 쓰는 식이죠. 그다음에는 아주 하찮은 것에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결혼, 건강한 아이들이나 미국에 사는 것처럼 인생의 중요한 부분에는 감사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처럼 실용적이지 않은 아름다움까지 즐겨봅시다.
얼룩배기 사물들을 만든 하느님께 찬미를 보낸다.
얼룩무늬 암소처럼 두 겹의 색깔을 지닌 하늘을 만드시고,
헤엄치고 있는 송어의 온통 점점이 박힌 장미 반점을 만드시고,
갓 붙인 석탄불처럼 터진 알밤들, 그리고 되새의 날개들,
구획되어 짜 맞춰진 풍경들 ― 목초지, 휴한지, 경작지,
그리고 모든 생업, 그들의 기구와 도구와 장비들.
Glory be to God for dappled things―
For skies of couple-colour as a brinded cow;
For rose-moles all in stipple upon trout that swim;
Fresh-firecoal chestnut-falls; finches’ wings;
Landscape plotted and pieced―fold, fallow, and plough;
And áll trádes, their gear and tackle and trim.
솔직히, 송어의 반점에 감사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을의 정취, 어릴 때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들처럼 작고 사소한 걸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에 감사합시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느끼는 것에만 감사하지 말고 못 느낄 때도 감사해봅시다. 저도 스스로 조언을 받아들여 감사할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가족, 믿음, 친구들, 일이 모두 포함됐죠. 그리고 칠면조에게도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감사합니다.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