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어떤 언어로 말했을까요? – 1994년 움베르트 에코의 인터뷰
롭스(L’Obs)는 움베르트 에코의 사망 소식과 관련하여, “완전한 언어를 찾아서”(영문 제목 The search for the perfect language, 1995 )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본지와의 1994년 인터뷰 기사를 다시 전합니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의 ‘십계’(1956년작)에서는 신이 특수효과와 영어가 뒤섞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다만 그것은 미국식 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신은 어떤 언어로 아담에게 말했을까요?
움베르트 에코. 신은 투명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완전한 언어를 구사합니다. 제 책은 신의 계시가 이루어졌던 말을 찾기 위한, 수 세기에 걸친 유럽의 노력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실 드밀에게 성경의 내용은 천둥과 번개, 기상 현상이 동반된 하나의 언어였습니다. 단테에게도 신이 아담의 머릿속에 소리를 울리게 하는 방식으로 텔레파시와 같은 소통을 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교회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히브리어를 인간 최초의 언어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그의 완전한 언어 속에서 물고기를 제외한 모든 동물들을 명명했다고 보시나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가지 가설을 내놓습니다. 어류는 한참 후, 낚시가 시작되면서 아담의 후손들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아마도 왜 다른 나라에 가면 생선을 주문하기가 이토록 어려운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송아지(le veau, 송아지 고기)”는 같은 단어인 경우가 많은데 비해 생선은 그렇지가 않아요.
대홍수 이후에도 보편적 조화와 관련하여 모든 이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죠… .
그러나 오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과 같이 높은 탑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바벨탑이지요. 이들을 벌하기 위해서 신은 아담의 언어를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뒤섞어 버립니다. 신화에 따르면 바로 이때 인간은 한 가지 언어에서 70~72개의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창세기 11장에 이 언어의 혼돈은 신이 내린 저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역사, 선생님의 책은 꿈의 연속과 파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선 히브리어가 완전한 언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네요.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에게 히브리어는 완전한 언어입니다. 그것은 이 언어가 아나그람이나 이합체 시와 같이 계속되는 철자의 조작을 통해 토라의 강독을 끝없이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철자 결합의 놀이를 통해 한 번 완성된 토라가 아닌, 영원한 토라를 찾아내는 것이지요. 한 사례로 모세의 원래의 질문,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신명기 30장 12절)를 나타내는 네 단어의 첫 글자들은 《MYLH : 할례》를 뜻하고, 마지막 글자들은 YHVH : 여호와를 나타냅니다. 모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할례받은 이가 신과 다시 만날 것이다》이죠. 13세기 유대교 신비주의자인 아브라함 압울라피아(Abraham Aboulafia)에게도 각각의 철자들은 전체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는 독립적인 별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카발라는 기독교 신비주의로 이어지는데요…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 de La Mirandole)에게도 히브리어는 완전한 언어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는 말과 행동을 조화롭게 합니다. 성경의 독자, 피코는 가장 난해한 변형을 두서없이 내놓습니다. 저는 그가 미소짓고 있지 않았나 궁금합니다. 그는 예를 들어 어떠한 방식으로 YHVH라는 신성한 단어가 죄라는 철자를 삽입함으로써 예수의 이름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테와 동시대 사람인 카타리파 라몬 룰(Ramon Lulle)의 경우도 보편적이고 결합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언어에 대한 그의 꿈으로 인해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삶을 살았다고 보이는데요…
그의 언어적 체계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알스 마그나(Ars magna, 1305)를 통해 무슬림을 개종하고자 했던 라몬 룰은 전설에 따르면 사라센인들에 의해 박해받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6세기 들어 히브리어는 완전한 언어로서의 지위를 점차 내주기 시작하는데요
중국을 방문하면서, 탐험가들은 성경 이전의 시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서 원죄 역시 유대-기독교 집단만에 해당하는 민족적 에피소드가 아닐까 하는 가정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또한 중국인들이 바벨탑의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은 원죄와 관계 없다는 이야기도 나오게 됩니다.
“민족주의적 가설들”에 바쳐진 부분에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완전한 언어에 대한 논쟁이 자주 교구에서의 논쟁으로 비화되는지 보여주시는데요…
각각의 민족은 대체로 자신의 언어만이 원초적인 언어, 혹은 적어도 아담의 히브리어를 직접 잇는 언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플랑드르어, 그 뒤에는 스웨덴어가 모든 언어의 기원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했습니다. 루터에게도 독일어는 신에게 접근하는 언어입니다. 할스도르프(Harsdörfer)의 경우에도 자연은 독일어를 사용합니다. 다른 경우에도 결국 히브리어 자체는 독일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우선 문명의 시원성을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들 너머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말의 깊은 단일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벨의 신화 – 언어의 증가 – 는 근대 국가, 즉 민족의 시초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이는 다양한 언어가 국가의 개념을 문제시하고 있는 오늘날의 유럽과는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에스토니아어 … 등 새롭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지난날의 소비에트 연방처럼 민족적인 집단들의 연합으로 나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라는 관념은 시대에 뒤떨어졌을까요? 왜 그렇지 않을까요? 제 경우에는 온건한 다언어주의라고 할까요 : 어떤 언어를 안다는 것은 다른 이를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반유대주의의 기원에도 언어적 요인이 있지 않을까요? 유대인들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언어를 그들끼리 사용했으니까요.
선생님의 책에서는 시원적인 언어를 찾기 위한 작업에서 점차 새로운, 인공적인 언어를 창조하는 시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결합에 의한 아찔함은 점점 지식의 영원한 완전함의 관념으로 이끌어갑니다. 이는 더 이상 완전한 언어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 부여한 것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7세기, 그의 “보편적인 조화(Harmonie universelle)”에서 마랭 마르센(Marin Mersenne) 신부는 다음의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아담이 정말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여야 했다면 에덴에서 그가 지냈던 시간은 대체 얼마나 길었을까요? 다른 문제로, 그는 쉽게 각 종들을 명명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개별자는 어떻게 명명하였을까요? 나의 30만 번째 머리카락은 어떻게 이름지을 수 있었을까요? 인위적인 문자 100개 정도만 만들면 충분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점점 꿈은 세속화됩니다. 사람들은 선험적으로 철학적인 완벽한 언어를 창조하기를 시도합니다. 이 인위적인 언어의 이상향은 화학 분야의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H2O의 경우 이 식이 지정하는 대상의 속성 자체를 드러냅니다. 철학적 언어의 유토피아, 이것은 만델레예프 주기율표에 둘러싸인 세계에 어울리는 것들을 우주 전체에 펼쳐나가려는 의지입니다.
이러한 선험적인 언어들에 대해서 후험적인 국제적 언어, 즉 에스페란토나 블라뷔크어와 같은 언어가 대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더 이상 완벽한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언어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우리의 민주적인 신념이 이를 용인한다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신비주의 사상으로는 예를 들어 완벽한 언어는 우선 비밀스러운 것이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e Ficin)의 부적, 시라노 드 베르제락의 새들의 언어 혹은 프랑수와 쉬드르(François Sudre)의 음악적인 보편적 언어 등에 답하는 선생님의 책을 읽은 후, 약간 선생님께서 자신의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를 쓰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단테와 같이, 조이스도 새로운 아담이 되려고 했지요. 단테처럼 그도 모든 언어와 뒤섞인 완벽한 언어에 대한 어두운 꿈을 쫓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소설을 출판하셨죠?
《전날의 섬》이라는 제목입니다. 17세기에 일어나는 일이지요. 피에트몬테 지역에 사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인데, 어떤 섬을 앞에 둔 황폐해진 선박에 조난당한 이야기입니다. … . 한 친구는 이 소설이 파스칼이 쓴 뒤마라 말하기도 했어요. 불행하게도 이는 뒤마가 쓴 하나의 파스칼일 뿐이지만요.
(L’o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