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마뇽인은 백인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백인종’의 프랑스를 상정하였던 선언(옮긴이 : 지난 9월, 당시 공화당 소속이었던 나딘 모라노가 프랑스가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백인종의 사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일을 말합니다)은 실상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시대착오적이고 과학적으로도 틀린 인종 개념을 적용하였음에도 이 발언에는 하나의 이상적인 프랑스가 아주 오래 전부터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시리아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유럽 대륙에 난민들이 들어오고 있는 오늘날 전혀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논쟁은 이방인에 대한 프랑스의 시선에 대한 토론을 다시금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또한 프랑스가 외국인으로 치부하는 이들, 그리고 수많은 논쟁을 거쳤으며, 2007~2010년 정부 부처의 명칭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문제 해결에 실패했던 국가 정체성의 윤곽에 대한 논쟁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논쟁과 관련하여 제기된 복잡한 문제들에 모두 대답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과학 기자, 선사시대 전문가로서 두 가지 지점에서 이 논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먼저 이 문제를 장기적인 관점으로 재배치하여 이 문제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밝히며, (2) 그 후 구석기시대 우리의 조상, 즉 지금의 프랑스 영토, 더 크게 보면 유럽을 점유하고 있던 이들의 정체와,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공포와 불안
첫 번째 사실 : 타자에 대한 공포, 특히 선사시대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나는 공포는 19세기 이래 소설 등 각종 문학작품에서 상시 등장해 왔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는 항상 필연적으로 위험요소이며 이 위험은 그의 접근 속도에 따라 점증됩니다. 위협의 결과 혹은 위협 자체는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J. H. 로스니의 소설, “불의 전쟁”에서도 주인공인 나오의 부족은 적대적인 부족에게서 불을 훔치고 한밤중에 목숨을 걸고 달아나야 했습니다(옮긴이 : “La Guerre du feu”는 1909년 출판된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Quest for fire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는 1970년대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척박한 땅의 굶주린 유목민들은 정착민들을 불시에 습격하였다. 이들은 미리 방어를 고려해야 했다.” 방황이 공포와 불안을 야기합니다. 저 바깥쪽은 적대적입니다. 반대로 지리적인 안정성은 평온함, 평화와 동의어입니다. 유목민은 위험요소이며, 정착민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초기 역사에 대해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이미지에서 불길한 특징은 일반적으로 이주민에 부여되고 있습니다. 더욱 일반적인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더욱 틀린 이야기도 없습니다.
두 번째 사실은 150년 이상의 발굴조사와 화석, 유전자, 고인류학이 알려주는 280만 년 전에 출현한 호모 속의 초기 인류(에디오피아, Ledi-Geraru 유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 출발한 이들은 모두 열대기후에 적응한 상태였으며, 여전히 일부 해부학적 특징이 우리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고온의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인 피부를 통해 땀을 배출하며 체온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그것입니다.
유럽에는 틀림없이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를 통하여 인구가 유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루지아의 드마니시(Dmanissi) 유적에서는 190만 년 전의 인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화석은 스페인, 시마 델 엘레판테(Sima del Elefante)에서 발견된 120만 년 전의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망통(Menton) 근처 각종 도구와 음식이 남아 있는 흔적이 있는 발로네 동굴(grotte du Vallonnet)에서 약 100만 년 전 인간의 존재가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은 토타벨(Tautavel) 유적으로 55만 년 전의 치아 두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이 집단들이 오랜 기간 동안의 진화 과정을 거쳐 결국 유럽에는 두 종류의 고인류가 출현하게 됩니다. 약 25만 년 전에 출현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시베리아 남부)이 그들입니다. 그 중 데니소바인에 대해서는 손목 뼈에서 확인된 DNA를 제외하고는 알려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원전 4만 년 무렵, 새로운 집단이 유럽에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해부학적으로 오늘날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신인류, 호모 사피엔스로 동부 아프리카에서 약 20만 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먼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던 이들은 필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 이주하였을 것입니다. 역시 오늘날에도 같은 이유에서 이주가 일어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새로 이주한 이들은 사냥감이 더욱 풍부한 지역으로, 혹은 식량이 되는 동물들의 무리를 따라 이주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수천 년에 걸쳐 유럽 대륙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의 유전적 유산은 지역에 따라 비율을 달리하며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데니소바인들과 혼합됩니다.
장대한 골격의 선조들
약 3만 년 전, 인구의 대체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유라시아 대륙에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크로마뇽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우리에 독특한 문화를 남겨주었습니다. 오리냐크 문화(Aurignacien, 유럽과 서남아시아에 존재했던 후기 구석기 문화)의 사람들은 위대한 자연주의적 예술작품을 남겼는데, 가장 오래된 것이 아르데슈(Ardèche) 지방의 쇼베-퐁 다르크(Chauvet-Pont d’Arc) 동굴로 약 3만6천년 전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약 8천 년 전부터 이들은 중동에서 도래한 농경-목축 집단과 조우하며 서로 혼합하였으며, 이렇듯 새로운 인간 집단이 섞여 들어오는 과정이 멈추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원에서부터 복잡한 혼합의 산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해보면, 당시 유럽을 점유하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이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륙의 경계에 오늘날과 같은 장벽을 설치하지 않았음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쇼베-퐁-다르크나 라스코가 터키나 남부 러시아에 있었다면 프랑스의 관광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리냐크 문화의 사람들과 그들의 직계 후손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크로마뇽인을 그린 만화의 주인공, ‘라한(Rahan)’과 같이 금발에 근육질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퉁가(Tounga)’와 같이 흑발의 과묵한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의 피부는 흰 색이었을까요? 명확하게 이 문제에 답할 수 없다면, 고인류학이 우리에게 중요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대지방 기원으로, 아프리카의 강한 햇살에 적응했던 우리의 구석기시대 조상들은 인상적인 체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간혹 신장이 180cm를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빛이 많은 기후 조건에 적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어두운 빛깔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피부의 탈색, 최근의 현상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홍채, 머리카락 및 피부색과 관련된 고인골 화석의 형태학과 DNA를 기반으로 한 최근의 고유전학 연구들은 피부색의 변화는 아프리카에 비해 일조량이 적었던 유럽의 기후에 적응하는 과정, 그리고 대륙의 동쪽에서 새로이 유입된 인구 집단과 혼합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하버드대 생물학자들이 지난해 3월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이 현상이 기원전 8,500년 경에 이루어졌으며, 피부색의 탈색과 관련된 형질이 이 시기 이전의 것으로 밝혀진 83개의 샘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따라서 쇼베-퐁-다르크와 라스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그린 이들은 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곱슬머리와 흑인 계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최초의 선사시대 연구자들은 그라베트 문화(Gravettien, 기원전 2만9천 년~1만9천 년 전)의 여성을 나타낸 소조의 육체 비례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상의 풍만한 육체는 남아프리카 코이산, 특히 슬픈 사연으로 유명한 호텐토트의 비너스의 주인공, 사르키 바트만(Saartjie Baartman, 1789~1815)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는 1920년 설립된 파리 고생물학 인류 연구소의 외벽이 흑인의 특질을 갖춘 남성이 로셀(Laussel, 도르도뉴 지방)의 그라베트 문화의 비너스를 조각하고 있는 모습의 부조가 설치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반대쪽 벽에는 코카서스인의 특징을 갖춘 한 남성이 마들렌 문화(Magdalénien, 약 1만5천 년 전)의 바이손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적 환상
우리는 여기에서 인종의 위계에 대한 암묵적인 관념을 다시금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인 표현이 이루어졌던 동굴벽화보다 조각이 먼저 이루어졌던 사실을 인종의 차이로 보았던 당시의 예술에 대한 역사가들의 진화론적 환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크로마뇽인은 거의 언제나 밝은 색의 피부로 표현되었으며, 여성들은 대체로 금발로 표현되었습니다. 대중적인 소설과 영화에 보통 이러한 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를 다룬 영화의 애호가들 중 1966년작 영화 ‘공룡 백만년’에 나왔던 북유럽 풍의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라켈 웰치(Raquel Welch)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 누가 있을까요? (옮긴이 : 영화 쇼생크탈출의 주인공 앤디 감방벽에 붙어있던 브로마이드의 주인공 라켈 웰치가 출연한 ‘공룡 백만년’은 허무맹랑하게도 공룡과 인간이 공존하였던 것으로 그렸음에도 ‘쥐라기공원’ 등 이후의 영화에 영감을 주었으며, 인간과 공룡이 실제로 공존하였으리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는 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말 구석기시대 벽화 예술을 발견했던 첫 세대 선사시대 연구자들이 선사시대 사람들이 필요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것으로 상정하고 그 예술의 고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 알타미라의 바이손들은 1878-1879에 알려졌습니다 – 오늘날에도 이 예술가들을 코카서스인의 특징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표현하는 데 망설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 덕택으로, 이제는 마침내 적절하지 않은 선사시대에 대한 표현을 끝마쳐야 하는 때가 온 것이 아닐까요?
이주와 혼합의 산물
배제, 불관용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수용된 거부의 담론이 정신에 깊이 뿌리박힌 관념에 대해서, 오늘날 프랑스라 불리는 인구집단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이 인류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주와 혼합의 산물로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대륙의 끝에 위치하여 자연스럽게 순차적인 도착의 땅, 즉 이주의 결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외에 우리가 구성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 전 우리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을 짙은 색의 피부를 가졌으며 우리의 서구 문화의 근간을 형성하였으며, 깊은 동굴 벽에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인류의 걸작을 만들었던 이들의 직계 후손으로서, 우리는 타자, 즉 오늘날의 이민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을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르몽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