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복을 좇아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알려주는 ‘어떻게 살 것인가’ (1)
1985년, 신화학자이자 작가인 조셉 캠벨(1904년 3월 26일 탄생 – 1987년 10월 30일 사망)은 전설적인 인터뷰어이자 아이디어 수집가이기도 했던 빌 모이어스와 마주앉아 긴 대화를 나누는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지 루카스의 스카이워커 랜치(Skywalker Ranch)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해를 넘겨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으로 이어집니다. 24시간에 걸친 날것의 결과물은 한 시간 분량의 에피소드 여섯 편으로 나뉘어 1988년, 캠벨이 영면에 든 지 얼마 안 되어 PBS에서 방영되는데, 이는 공중파 텔레비전의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시리즈물의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모이어스와 PBS 제작팀은 텔레비전 방송으로 제작되지 않은, 약 4분의 3에 달하는 미편집 대화분이 대중의 주목을 받을 만할 뿐 아니라 보존할 가치가 있을 만큼 풍부한 깊이를 지녔다고 느꼈습니다. 방영 직후 완전한 대화 기록이 <신화의 힘(Power of Myth, 퍼블릭 라이브러리)>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는데, 이는 자아의 신화와 문화적 신화 및 심리적 원형들과 영성에 관하여 캠벨이 들려주는 입체적인 논의입니다. 이 책은 속세의 경전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데, 애니 딜라드의 <자연의 지혜(Pilgrim at Tinker Creek)>와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시몬 베이유의 기록들과 소로우의 일기처럼 보기 드문 걸작의 전범(典範)이자 경험에서 오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모이어스가 서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캠벨은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원죄란 “둔감하며, 몽매하고, 깨어 있지 않은 정신의 죄”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책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캠벨의 삶에 대한 철학을 압축한 격언, 즉 “네 천복을 좇으라”는 문구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짓누르는 압박의 고함소리가 절정에 이른 오늘날로부터 십여 년 전, 이미 캠벨은 영혼의 부르짖음에 동정심으로 귀기울여 우리가 느끼는 실존적 불만족의 근원이 무엇인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고 우아하게 짚어냅니다. 그가 모이어스에게 말하길:
만일 내가 나의 천복(bliss)을 좇는다면, 나는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날 기다려 왔던 그 길에 들어서게 되며, 그로써 내가 살아야만 하는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됩니다. 어디에 처하든, 각자의 천복을 좇기만 한다면 언제나, 자기 안에 존재하는 삶, 재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죠.
자신의 천복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공간”, 즉 방해받지 않는 상념과 서두르지 않는 창조적 작업을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캠벨은 말합니다. 이 공간이야말로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자기들만의 독특한 의식을 실천에 옮기는 곳이자, 인지과학이 밝혀낸 바 더 나은 일상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신성한 공간]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필요성을 지닙니다. 단 하루 혹은 한 시간만이라도, 조간신문에 무슨 얘기가 실렸는지, 친구들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알지 못하는 여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이 될지 그저 경험하고 이끌어내는 장소로서의 여백입니다. 창조를 위한 산실입니다. 첫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성한 공간”을 찾아내어 머문다면, 결국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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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며 우리 삶은 너무나 경제적이고 실용적이 된 나머지, 대단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순간의 부름들 앞에서조차 우리는 대체 우리가 어디쯤에 있으며, 무얼 하려 하는지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늘 요구된 바를 하고 있을 따름이죠. 천복을 위한 처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적어도 찾아내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군중의 비겁함에 등 돌리라 훈계했듯, 캠벨은 사회가 금그어 놓은 성공의 상이 우리를 고리타분하고 안전하기만 한 길로 내몰기에, 천복의 처소로 이르는 길을 종종 잃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다수가 따르는 규칙이 정치 뿐 아니라 사고방식으로서도 효율적이리라는 믿음은 민주주의의 특징입니다. 다수의 사고방식은, 물론, 언제나 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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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면에서 다수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음식이나 잠자리며 자식이나 재물에 대한 생각 그 너머를 경험한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경청하려 애쓰는 일이죠.(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