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브룩스 인터뷰] 직업적 성취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2015년 4월 20일  |  By:   |  문화  |  3 Comments

직업적 성취가 삶의 성취를 가늠하는 데 있어 얼마나 불충분한 잣대인가

지금까지 생각한 것 이상의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발견하게 된 근본적인 진실은 직업적 성공이 삶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 달쯤 전, 이민자들에게 영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서자 아마 쉰 살에서 여든 살 정도 될 법한 서른 명 가량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그러움과 인내심과 삶에 대한 감사로 빛나고 있었고,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번 생에서 나는 분명 직업적 성공을 거뒀지만 저들이 발하는 빛을 내면에서 일궈내진 못했다. 삶이 단 한 번뿐이라면, 어떻게 그들이 도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기실 이 책은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해 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책을 쓴다고 저들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로드맵 정도는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데이빗 브룩스 그 자신을 뻐기는 나르시시스트가 되기 위해, 남들 앞에 의견을 쏘아붙이기 위해, 진정한 나 자신보다 훨씬 자신감 넘치고 똑똑하고 뛰어나고 권위적인 인물로 보이기 위해” 많은 것을 지불했고 그 대가로 “겉치레로서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만 하는”사람으로 묘사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심한 표현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이 정확하겠지요. (인터뷰 담당자를 향하여) 우린 둘 다 마이크로폰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을 가졌고, 이런 직업적 조건은 우리가 언제나 옳아야 하고 주목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케 하는 ‘품성의 시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기실, 보다 성숙한 삶을 향한 전환점이란 자신을 돌아보며 “떳떳치 못한 행동을 저지르게 만드는 약점이 무엇일까?”라고 질문하는 순간에 있을 것입니다. 네, 저는 나아졌다고 감히 말합니다. 정치나 피상적 성공 같은 데 모든 생각을 쏟아붓는 표면적 삶을 살 때가 있었죠. 그 점에서라면 조금 더 나아졌지만 여전히, 모두가 절 사랑하길 바라고 갈등을 피하고 싶어하는 ‘원죄(core sin)’를 내면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만 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 지닌 ‘원죄’에 대하여

위대한 사회개혁가이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조언자이기도 했던 바야드 러스틴에게 원죄는 그의 자아(ego)였습니다. 여성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는 파편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죠. 소설가였던 조지 엘리엇은 친밀함을 갈구했습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면, 그의 열정이었겠죠. 그는 분노하고 또 분노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의 원죄와 맞서 싸우고자 했고 삶을 마칠 무렵 그들은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해졌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우리들을 위한 모델일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본받아 살려 합니다.

전문가 혹은 칼럼니스트가 품성을 기르는 데 그다지 좋은 직업이 아닌 이유에 대하여

모든 직업엔 시련이 따릅니다. 품성의 시련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자신을 ‘브랜딩’합니다. 취직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떠벌려야 하죠. 소셜 미디어 상에서도 삶에서 낚아올린 근사한 순간들을 페이스북에 올림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전 책에서 지칭했던) ‘“큰 자아”의 문화’, 스스로를 끝도 없이 자랑함으로써 칭찬받고 보상받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통계 자료가 있습니다. 1950년 갤럽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본인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오직 12%만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2005년에 같은 질문을 다시 물었을 때 80%가 본인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답했습니다. 스스로를 부풀릴 것을 요구받는 문화 속에서, 내면의 덕성을 쌓고자 노력하는 첫걸음은 부풀려진 자아를 조금 줄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단어가 지녔던 도덕적인 의미를 되돌리는 것에 관하여

세대를 거치며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단어들이 있습니다. 개중 일부, 즉 부활, 죄(sin), 은총과 같이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도 있지만, 단어의 의미를 상기하기 위해 굳이 종교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살찌는 디저트에다 죄라는 단어를 갖다붙이고 있지만, 한때 그 단어는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모두 같은 원죄, 즉 이기심과 자의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자각을 나타내는 핵심적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자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점에선 우리 모두 망가져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N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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