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에게서 배우는 우정의 가치
2015년 4월 13일  |  By:   |  문화, 세계  |  1 comment

한나 아렌트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지적인 동료이자 친구였던 매리 매카시가 유산하고 정신적 위기를 겪을 때도, 스승이자 멘토였던 칼 야스퍼스가 전후 독일에서 고난을 겪을 때에도, 늘 그들의 곁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었던 하인리히 블뤼허가 학계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그의 편에 섰습니다.

존 닉슨은 그의 최근 저서인 <한나 아렌트와 우정의 정치학>에서 한나 아렌트가 벗들과 어떤 우정을 쌓아 왔는지 조망합니다. 닉슨의 책에서 당대의 지성인이자 스캔들의 중심이었던 아렌트는 우정과 생각을 나누는 데 골몰한 한 명의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삶은 우정이라는 이름 하에 지나치기 쉬운 인간관계의 역동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우정이란 우정에 대한 관념을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조망하고 비추어보는 작업도 아닙니다.” 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렌트에게 우정이란 사적 영역에만 머무르는 관념과 공적 영역의 가혹한 현실 사이의 완충지대였습니다. 우정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베일에 가려진 사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다듬으며 보다 나은 형태로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벗이란 지적 세계의 동지들이었으며 아렌트는 그들에게 변함없이 충실했습니다. 이는 벗들이 베푼 친절에 상응하는 깊은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망명자 중의 망명자, 모국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해온 그에게 우정이란 전체주의의 군화에 짓밟힌 자유, 그리고 보다 높은 인간적 가치를 대변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우정을 나누며 싹트는 즐거움과 동지애는 파시즘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아렌트는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납니다. 홀로코스트가 유태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던 그의 반유대적 사상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전시에 보인 용서할 수 없는 행동과 아렌트의 업적에 대한 “완벽한 침묵”조차도 그를 하이데거에게서 떼어놓진 못했습니다.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직후 그는 가깝게 지내던 유태계 지식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옥스포드에 있던 이사야 벌린은 아렌트를 대놓고 배척했습니다. 오랜 친구이자 멘토였던 커트 블루멘펠트는 그를 거부했을 뿐더러 화해조차 하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역시 오랜 친구였던 게르솜 숄렘은 편지를 보내어 “악의 평범성”이란 그저 “슬로건”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아렌트의 오랜 친구들은 그가 사려깊은 비판과 명백한 불경(blasphemy)을 분별하지 못했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무신경한 폭력을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이성적 태도로 잘못 착각했다고 여겼습니다. 지적인 동료들에게 충실하고자 했던 그였으나, 동족인 유태인에게는 가혹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고뇌에 찬 친구였습니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보여준 친나치주의적 열정이 딱히 아렌트를 겨냥한 건 아닐지라도, 벗의 삶을 규정해 온 근원적 사실을 증오함으로써 성립하는 우정이란 대체 어떤 걸까요? 아렌트가 하이데거에게 바쳤던 지속적 존경을 놓고 볼 때, 극도의 자기혐오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은 남들의 경멸 앞에 무감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자인 닉슨은 우리가 아렌트의 ‘우정’에 대해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몇십 년에 걸친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들며 그는 말합니다. “아렌트가 스스로에게 던졌을 법한 질문은 ‘어떻게 이 남자를 향한 우정과 애정과 충실함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가 아닌, ‘근원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 남자와의 갈등을 돌이킬 수 없다면, 그 갈등의 결과를 어떤 식으로 살아내야만 할까?”일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닉슨의 저서를 철학사나 평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계발의 지침으로도 읽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한 삶은 결혼만큼이나 튼실하게 묶인 우정에서 비롯됩니다. 저자는 아렌트가 그의 친구 매카시에게 했던 말을 간추려 보여줍니다. “결혼은 끝이 나고 욕망도 시들지만 우정은 계속될 수 있으며 계속되어야 하지.” 이 점에서 아렌트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소통과 드문 교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한 명의 사례입니다.

오늘날의 삶은 질보다 양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새로운 경험이 익숙한 즐거움을 대체합니다. 오래된 친구에게 충실한 것은 세상이 주는 온갖 무수한 경험의 폭을 제한하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안정된 우정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검증해볼 수 있는 시험대인 동시에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우정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공과 사의 쌍방으로 흐르는 흐름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며,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도 그 풍부함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게끔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우정관과 그 저변에 깔린 정치학은 한 가지 시각으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자는 그녀의 삶과 우정에서 우리가 새롭게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릴 뿐입니다. 순전하고 오래 가는 우정, 경애와 충실함과 실없는 장난과 함께한 고난으로 이루어진 우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오직 혼자일 뿐입니다. 트위터 팔로잉 숫자 따위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자는 말을 맺습니다. “아렌트 못지않게 우리에게 우정은 인생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학습입니다.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뉴리퍼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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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o Young Ko

    덕분에 좋은 글귀를 잘 읽었습니다. 우정과 결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원문을 번역해보았는데 아하바스 이스라엘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훌륭한 기사를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입장에서 이렇게 쓰였으면 어떨까 싶은 부분들을 수정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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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는 좋은 친구가 아니기도 했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던 하이데거의 반유대적 발언이 적힌 ‘검은 수첩’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 아렌트는 2차대전 이후 하이데거와 함께 했다. 닉슨의 말에 따르면 하이거는 아렌트의 “가장 뛰어난 스승”이었다. 그가 아렌트의 성공한 업적들에 대해서 침묵한 것과 전시에 보인 용서할 수 없는 행동들도 아렌트를 그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닉슨의 말을 빌자면, “아렌트는 “인정받기 위해” 하이데거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아렌트의 저작 에서 홀로코스트는 인류를 향해 행해진 범죄이며, 독일인들은 전 세계를 향해 폭력을 행하려 했었고, 부차적으로 유대인이 그 희생자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가 이 글을 쓴 목적은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만을 향해 이루진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범죄행위였다는 것을 전달하려한 것인데, 이것이 나중에 유대인은 흩어져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 자신의 민족의 개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주는 예시라고 사용되었다.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과의 우정에 쏟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유대인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전세계에 이 출간된 직후 아렌트는 “겉만 번지르르한 논리”이며 독일이 짊어져야할 비난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며 몸서리치는 유태계 지식인 동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옥스포드에 있던 이사야 벌린은 아렌트를 대놓고 배척했다. 오랜 친구이자 멘토였던 커트 블루멘펠트는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고 죽는 날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발터 벤야민의 작품을 함께 보존하는 작업을 진행했던 오랜 친구 게르솜 숄렘은 더 분노했고, 아이히만 출판 직후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악의 평범성”이란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슬로건”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아렌트가 무책임함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나치의 점령하에 유대인 집단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주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견해이다” – 아하바스 이스라엘

    아렌트의 오랜 친구들은 그가 깊은 고찰에서 나오는 비판과 명백한 모독행위를 구분하는 선을 넘어서서 희생자들을 향한 무신경한 잔인함을 보인다고 여겼다. 동료들에게 충실했던 그였으나, 동족인 유대인에게는 가혹했다.

    한나 아렌트는 고뇌에 찬 친구였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보여준 나치를 향한 열정만큼 아렌트에게도 마음을 쏟았을 지는 모른다. 벗의 전기적 삶 자체를 증오하는 속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우정은 도대체 어떤종류의 우정이었을까?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계속 존경했던 것으로 보아, 아렌트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이 우정을 계속 했거나, 적어도 남들의 경멸 앞에 눈을 감으려 했고 그 맹점이 아렌트로 하여금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Arendt would argue, as she did, that “I have never in my life ‘loved’ any people or collective. … I indeed love ‘only’ my friends and the only kind of love I know of and believe in is the love of persons.” Turning a blind eye to such egregious failures of morality led to Eichmann in Jerusalem’s missteps, in which Arendt’s lack of “Ahabath Israel” made for a perverse accounting of the Holocaust.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생에서 어떤 특정 사람들이나 집단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 진실로 오직 내 친구들만을 사랑하고,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유일한 사랑이란 그 사람들에 대한 사랑뿐입니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비도덕을 눈 감은 것이 아이히만에게까지 이끌었다. -> 이 부분은 해석이 잘 안 되네요

    Nixon argues that when we look at Arendt’s friendships, we are asking all the wrong questions. “The question for her,” he says, referring to her decades-long entanglement with Heidegger, “was not ‘How can I justify to myself my continuing friendship, affection, and loyalty to this man?,’ but ‘Given the irreversibility of my original encounter with this man, on what terms should I live out the consequences of that encounter?’”

    저자인 닉슨은 우리가 아렌트의 ‘우정’을 보면서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몇십 년에걸친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아렌트가 스스로에게 던졌을 법한 질문은 “어떻게 이 남자를 향한 우정, 애정 그리고 충실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와 원래부터 만난 적 없었던 것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이제 이 만남의결과를 내가 어떻게 살아내야할까?”라고.

    우리는 닉슨의 저서를 철학사나 평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계발의 지침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 이혼을 겪은 아렌트의 삶을 돌이켜보면, 결혼만큼이나 튼실하게 묶인, 혹은 그보다 더 강하게 묶인 우정에서 감정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한 삶이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결혼은 끝이 나고 욕망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아렌트가 그의 세번째 남편 보덴 브로드워터와의 이혼 중에 친구 매카시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우정은 계속될 수 있고 그래야합니다.” 닉슨은 아렌트를 우정의 롤모델로 묘사한다. 닉슨에 따르면, 계속되는 소통 속에서도 교감은 드문 이 사회에서 아렌트는 연구되고 지향되어야 할 인물이다.

    The implication is that Arendt’s is a road not taken, one in which ferocious loyalty to old friends has been replaced by counts of mostly anonymous Facebook friends. Contemporary life favors quantity over quality, new experiences over familiar pleasures. To be loyal to old friends is seen as artificially limiting the panoply of experiences available in the world. But sturdy, stable friendships, as Nixon argues, are our testing ground and our protected space: “We need friendship because it eases the two-way flow between the private and the public, ensuring that we are neither overwhelmed by the world nor in denial regarding its plurality.”

    The politics of Hannah Arendt’s friendships are, in the final accounting, a mixed bag. But Nixon gestures at the lesson we can all take away from her complex, well-examined, ultimately exasperating life: that without genuine, long-lasting friendships, made up of equal parts loyalty and affection and mischievousness and shared struggle, we are entirely alone in the world, our Twitter following be damned. “Friendship, for Arendt as for most of us,” Nixon tells us, “was an exercise in lifelong learning. It was—and is—how we learn to live together.”

    페이스북의 익명의 친구들이 오랜 친구와의 강렬한 충실함의 자리를 대신하는 세상에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하나의 가지않은 길을 제시한다. 오늘날의 삶은 질보다 양에 초점이 맞춰지고 사람들은 익숙한 즐거움보다 새로운 경험을 선호한다. 오래된 친구에게 충실하는 행동이 세상에서 할 수 있을 무수한 경험들을 제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안정된, 지속 되는 우정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검증해 볼 수 있는 시험대인 동시에 보호 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정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공과 사에 있어서 서로를 향해 흐르는 흐름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며,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도 그 풍부함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게끔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우정관과 그 저변에 깔린 정치학은 한 가지 시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다만 저자는 그녀의 삶과 우정에서 우리가 새롭게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릴 뿐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충실함, 실없는 장난과 함께 이겨냈던 고난으로 쌓아올려진 순전한 우정, 이 없이는 우리는 이 세계에서 오직 혼자일 뿐이고 트위터의 팔로잉 숫자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닉슨은 말한다. “아렌트에게도 우리에게도, 우정이란 생애 전반에 걸친 끝없이 계속되는 과정이고,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입니다.” (뉴리퍼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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