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피츠버그 대학 언어학과의 학과장으로 근무한 지 9년째, 에버렛은 인문과학대학 학장과의 다툼에 휘말렸다. 커렌은 당시 언어학과 석사학위를 마쳐가는 중이었고 에버렛의 학과에서 수업조교로 일하며 봉급을 받고 있었다. 에버렛은 커렌에게 전부 이천 달러 가량을 부적절하게 지불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으며 감사에 처해졌다. 에버렛은 이 일로 심한 비난을 당했으나, 비난에 편승하는 주변 사람들의 행태는 그를 분노케 했다. 커렌은 그에게 일을 그만두고 함께 정글로 돌아가 선교사로서 피라한 족과 작업을 계속하자고 종용했다.
에버렛이 마지막으로 선교사 일을 수행한 지 이미 십여 년이 넘었다. 그의 신앙심이 엷어져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더 많이 읽고 철학에 빠지고 비기독교인인 친구들을 만날수록,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을 지속하기 어려워졌어요.” 그는 말했다. 그러나 에버렛은 아마존에 되돌아간다는 생각에 끌렸다. 꺼져가는 신앙심을 되살리길 바랐기도 했고, 지난 이십 년간 그의 지적 삶을 지탱하던 이론에 대해 품었던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이상 촘스키의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에버렛은 내게 말했다. “학계에서 인생을 보내는 건 공허하고 무의미한 일이라 느끼기 시작했구요.”
1999년 가을, 에버렛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마이시 강둑에 에버렛과 커렌은 배로 실어나른 14톤의 경질목을 써서, 벌레와 뱀이 들지 않는 가로세로 8미터의 방 두 개짜리 집을 지었다. 에버렛은 가스 스토브와 발전기로 돌아가는 냉장고, 정수 시설, 텔레비전과 DVD 플레이어를 설치했다. “피라한 족처럼 이십 년쯤 살고 보니 최소한의 살림살이로 사는 법을 배웠죠.” 그는 말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헌신했으며 누가복음을 피라한 어로 번역해 부족민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곧 사그라들었다. 피라한 족이 성경에 어떤 영적인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 마침내 에버렛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칭했으며 집을 돌보고 언어학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2000년 포르토벨로– 피라한 마을에서 약 이백 마일 정도 떨어진 소읍에서 그는 맨체스터 대학의 동료가 한 달쯤 전에 보낸 이메일을 발견했다. 연구교수로 일 년을 머물러 달라는 초청이었다. 2002년 에버렛은 정규직으로 고용되었고 그와 커렌은 잉글랜드로 옮겨갔다. 3년 후 그와 커렌은 헤어졌다. 커렌은 브라질로 돌아가 피라한 마을과 포르토벨로의 아파트를 오가며 보냈다. 그는 지난 가을 미국으로 돌아가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새로운 직장을 시작했다. 오늘, 에버렛은 정글에서 보낸 삼 년이 전혀 시간낭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피라한 족과의 새로운 시작은 대단한 해방감을 줬어요.” 그는 말했다. “촘스키적 제약에서 벗어나 문법과 문화 간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할 수 있었죠.”
피라한 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논문이 그가 아닌 그의 친구(이자 피츠버그의 옛 동료)인 피터 고든이었다는 건 에버렛에게 다소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고든은 현재 컬럼비아 대학에 있으며 2004년 사이언스에 피라한 족의 수 이해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 에버렛이 피라한 족의 제한적인 ‘하나‘, ‘둘‘, ‘여럿‘ 셈법을 소개한 후, 고든은 그와 함께 1990년대 초에 피라한 족을 방문했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남반구의 섬들,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많은 부족들이 ‘하나–둘–여럿‘이라는 수 체계를 사용하지만 피라한 족과 비교할 때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 부족들은 다른 언어로 셈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포르투갈어로 열까지 셈하는 법을 가르치려던 에버렛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라한 족은 결코 다른 언어로 숫자 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1992년, 고든은 두 달 동안 피라한 족과 머물며 부족민에게 여러 실험을 실시했다. 그중 하나로, 그는 피라한 족 피험자와 마주앉아 여러가지 물건, 즉 견과류나 AA 건전지 등을 한 줄로 늘어놓고 짝을 맞춰보도록 시켰다. 줄이 두세 개의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을 땐 정확하게 잘해 냈지만 물건의 개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수행은, 고든이 나중에 기술한 바,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든은 피험자에게 견과류들을 보여주고 깡통에 넣은 후, 한번에 한 개씩 꺼냈다. 견과류를 꺼낼 때마다 그는 피험자에게 깡통 속에 몇 개가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피라한 족은 세 개 혹은 그 미만일 때만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이 실험을 포함한 다른 실험들을 통해, 고든은 에버렛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피라한 사람들은 셋보다 큰 수와 관련된 과제는 수행할 수 없다. 고든은 집단 지적장애(mass retardation)에 대한 가능성은 배제했다. 타 부족과 혼인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지만 여자들이 외부인과 자는 일은 허용함으로써, 피라한 족은 끊임없이 유전자 풀을 새롭게 유지해 왔다. “한편,” 고든은 말했다. “애팔래치아 근친교배(Appalachian inbreeding)나 그에 따른 지적장애가 일어나고 있다면 이마의 머릿선이나, 얼굴의 형태나, 운동능력으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들에게선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든은, 지난 세기 초 사피어의 제자였던 벤자민 리 워프에 의해 제기되어 논란을 일으켰던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피라한 족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추측했다. 워프는 어휘체계를 구성하는 단어들이 사고하는 바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피라한 족이 두 개 이상의 숫자를 지칭하는 단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 큰 수량을 다루는 능력도 제한적이라고 고든은 쓰고 있었다.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거죠,” 고든은 내게 말했다. 그의 논문인 <단어가 배제된 수리적 인지: 아마존 부족의 사례(Numerical Cognition Without Words: Evidence from Amazonia)>는 신–워프주의 언어학자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에버렛은 열광에 동참하지 않았다. 고든에게 피라한 족을 소개한 이래, 그는 피라한 족이 고정된 수를 지니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나’(hoi, 떨어지는 어조)라고 오랜 동안 믿어왔던 단어는, 피라한 족에겐 보다 일반적으로 ‘작은 크기 혹은 적은 양’을 의미하며 ‘둘’(hoi, 올라가는 어조)은 흔히 ‘좀더 큰 크기나 많은 양’을 뜻한다. 에버렛은 그러한 오해가 ‘번역상의 실수’에서 비롯했다고 말한다. 단순히 몇 가지 사례에서 의미가 겹친다는 이유로, 한 언어의 특정 단어가 다른 언어의 특정 단어와 동일하다는 확신이다. 고든은 그의 논문에서 ‘하나’와 ‘둘’을 나타내는 단어 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고 언급했으나, 에버렛의 견해에 따르면 고든은 그러한 현상이 지닌 중요성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고든은 동의하지 않았고 둘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고든의 논문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버렛은 그 논문의 ‘오류’를 지적하는 새 논문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피라한 어에서 숫자어휘가 부재한 현상은 이전부터 나타나던 일군의 ‘공백’들 중 하나라 결론지음에 따라, 에버렛의 논문이 다루는 범위는 넓어져갔다. 에버렛은 삼 주에 걸쳐 그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수많은 궁금증에 새로운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이후 문화인류학 저널에 실릴 이만 오천 자짜리 논문으로 발전한다.
언어에 대한 사피어의 문화적 접근에서 영감을 얻은 에버렛은, 피라한 족이 ‘현재를 사는 삶’을 너무나 강력하게 체화한 나머지 그러한 에토스(ethos, 민족이나 사회에서 드러나는 특징적 관습- 역자 주)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관찰할 수 있는 경험만이 참이라는 실존적 관념에 몰두한 나머지, 피라한 족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물론 색채 용어도, 수량을 나타내는 용어도, 숫자도, 신화도 쓰지 않는다. 피라한 족은 직접 겪은 경험의 테두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 (에버렛의 정의에 따르면) 직접 보고 듣는 것 혹은 살아 있는 누군가가 보거나 들었다는 것에만 기대어 현실을 지각한다. 에버렛은 xibipío 라는 단어를 그 예로 든다. “누군가 강의 굽이를 돌아 걸어가 버리면, 피라한 족은 그 사람이 ‘가버렸다’고 하지 않고 ‘xibipío’ 라 합니다. 경험에서 나가버렸다’고 하지요.” 에버렛은 말했다. “그들은 촛불빛이 깜박일 때에도 같은 구절을 사용합니다. 빛이 ‘경험에서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는 겁니다.”
에버렛이 보기에 피라한 족이 경험적 현실 앞에 바치는 흔들림없는 헌신, 즉 그가 ‘경험–즉시성의 원칙(immediacy-of-experience)’이라 칭한 개념이야말로 부족민이 기독교 신앙에 보이는 저항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피라한 족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예수가 이천 년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피라한 족은, 내가 벌레 퇴치제를 바르던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었다. 에버렛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음식 저장고를 짓지 못한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대해 계획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만들었던 모형 비행기가 조각을 제작하는 전통을 낳지 못한 것은 그 모형이 실제 비행기의 모습에 잠시 뒤따르는 흥분을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었다. 피라한 족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전해주는 고유의 설화가 없는 이유 또한, 그런 이야기가 그들 부모와 조부모의 경험 밖, 그 이전의 과거에 파묻힌 수수께끼이기 때문이었다.
에버렛은 이 경험–즉시성의 원칙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핵심 문법의 저 깊은 곳”, 즉 촘스키가 모든 언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특징(회귀성)에까지 “그 촉수를 뻗친다고” 주장했다. 촘스키와 다른 전문가들은 회귀성(혹은 재귀 용법)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어떻게 가장 단순한 입말을 구사하는지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 소녀가 침대 위에서 뛰었다”는 명사구(‘그 소녀’)와 동사(‘뛰었다’), 그리고 전치사구(‘침대 위에서’)로 구성된다.
촘스키가 자신의 이론에서 강조했듯 언어의 덩어리, 즉 청크(chunk)를 다른 청크 안에 무한히 집어넣는 식으로 계속하여 마침내 끝나지 않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테두리가 약간 쭈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보기 좋게 우아한 모자를 쓴 남자가, 핫도그를 먹는 사이 좀 길기도 긴 커피 마실 짬을 내려는 한 떼의 공사장 인부들이 다시 깐 거리를 걸어 …) 혹은 절대 끝나지 않는 종류의 문장들을 지어낼 수도 있다. 하나의 생각을 다른 생각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무제한의 의미를 생성하는 능력이야말로 촘스키 이론의 고갱이였다. 촘스키는 그것을, 19세기 초기의 독일 언어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를 인용하여, “유한한 의미의 무한한 활용”이라 칭했다.
그러나 에버렛에 따르면, 피라한 족은 구를 다른 구들에 끼워넣는 식의 재귀 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분리된 단위로서의 생각을 기술한다. 언젠가 내가 에버렛에게 피라한 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는 강가에 있던 개가 뱀에게 물리는 것을 보았다”라는 문장을 말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가 대답하길 “아뇨. 그들은 ‘나는 개를 봤다. 개는 강변에 있었다. 뱀이 개를 물었다.’라고 말할 겁니다.” 에버렛이 설명하길, 피라한 족은 오직 그들이 관찰하는 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말은 오직 직접적 주장(“개가 강변에 있었다”)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내포문(embedded clauses)(“강가에 있었던”)은 주장이 아니라 정보를 뒷받침하고 정량화하거나 수식하는, 말하자면 추상적인 언어가 된다.
그의 논문에서 에버렛은, 회귀성이 언어적이라기보단 인지적인 특질이라 주장했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인지심리학자 및 컴퓨터 과학자였으며 (촘스키 언어학의 중심이 되는 회귀적 트리 구조에서처럼) 한 실체를 다른 실체에 끼워넣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정보를 조직하는 자연스런 방식이라 주장한 허버트 사이먼의 유명한 1962년 논문 <복잡성의 구조(The Architecture of Complexity)>을 인용하며 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프로그램은 트리 구조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폴더 하나를 열면 그게 다른 둘로 나뉘어지고, 그게 또 다른 둘로 나뉘어지는 식이죠. 그게 트리 구조입니다. 사이먼은 이러한 특질이야말로 인간이 정보를 조직하는 데 필수적이며 인간의 모든 지적 체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이먼이 맞다면, 그건 일반적인 인지능력이기 때문에 특수한 언어적 원칙을 들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혹은, 에버렛이 흔히 하는 얘기처럼 “한 생각을 다른 생각에 끼워넣는 능력은 그냥 인간의 방식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종들에 비해 똑똑하니까.” 에버렛은 피라한 족이 이러한 인지적 특질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통사구조에서 그러한 특질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문화적 제약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계속 이어집니다)
출처: 뉴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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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잘 읽고 있습니다. 전 '빠빠라기'의 속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어요. 추장이 문명에 느낀 낯설움같은 것들을 저는 연구자들을 보며 느끼고 있어요. 피라한 족보다 연구자들의 말투와 생각이 더 이방인같은 이 느낌은 뭐죠? ㅎㅎ
메리 도리아 러셀의 '스패로' 가 생각나네요. '번역상의 실수'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