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과학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1/2)

팟캐스트와 같은 “준사회적(parasocial)” 미디어들은 친구 관계와 물질적인 관계를 뒤섞고 있다.

(Brendan Mackie, 리얼라이프)

원문 보기

 

지난 10년 동안 인터넷의 유명인에게 일방적인 친밀감을 느끼는 현상은 매우 흔해졌습니다. 이는 준사회적(parasocial) 관계라는 것으로, 사회적 관계와 거의 비슷하지만 다른 관계, 혹은 다소 뒤틀린 사회적 관계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코미디언 존 멀레이니의 팬들은 그의 농담에 웃을 때 만큼이나 그가 겪은 최근의 힘든 일을 걱정합니다. 블랙핑크나 트와이스와 같은 K팝 그룹의 팬들(각각 Blinks 와 Onces)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지지하기 위해 유튜브에 수백만 개의 댓글을 올립니다. (“로제는 이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우리도 그를 그렇게 지지해야 해!”) 트위치에서 누군가의 마인크래프트나 배틀그라운드를 몇 시간씩 구경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운동 기구인 펠로톤의 화면 속 트레이너 역시 우리를 땀 흘리게 만드는 운동 코치라기보다 나와 같이 신체 관리의 여정을 떠나는 동반자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팟캐스트의 진행자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가디언에 실린 위 사진은 이를 잘 나타냅니다. 사진에서 아이는 음식을 먹으며 떠들고 있는 TV 속 연예인들을 보며 마치 서로 어울리고 있는 듯 웃고 있습니다. 나 역시 몇몇 팟캐스트와 그런 준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유쾌한 조언을 주는 “마이 브라더, 마이 브라더 앤 미”와 실제로 던전앤드래곤 게임을 플레이하는 “더 어드벤처 존” 등을 진행하는 맥엘로이 형제들이 그들입니다. 나는 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팬 서브레딧(subreddit)에 가입했으며, 그들이 만든 밈을 보고 웃고, 그들이 파는 제품을 구매합니다. 나는 그들이 만드는 콘텐츠의 팬인 동시에 그 형제들의 팬입니다. 그들의 어릴 때 별명, 그리고 그들이 가진 우울증이나 불안을 알고 있으며, 저스틴이 파이트 클럽 DVD를 훔친 일로 블록버스터에서 해고당한 일도 알고 있습니다.

맥엘로이 형제들은 내 삶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매주 월요일 나는 그들이 “마이 브라더, 마이 브라더 앤 미”의 새 에피소드를 올릴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씨름하던 시절 나는 때로 이불 속에 들어가 기분이 괜찮아질 때까지 그들의 팟캐스트를 들었습니다. 다소 민망한 말이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을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그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맥주 한 잔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정말로 우연히 같은 회사에 다닌다면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

오늘날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유명인을 자신의 친구처럼 느끼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친구라는 개념의 긴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우리가 친구를 통해 소속감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로이 바우마이스터와 마크 리어리는 1995년 논문에서 예측 가능하고 질서 있는 구조 속에서 타인과 즐거운 관계를 맺을 때 사람들의 소속감 충족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러한 소속감은 배우자, 부모, 자식, 형제, 조부모, 친척 등을 통해 채웠습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우정이란 이런 가족 구조가 파괴된 상황에서 친구나 연예인, 팟캐스트 진행자 등 가족 밖에서 맺은 관계를 통해 소속감을 채우는 데 필요한 개념입니다.

14세기 유럽에선 대기근과 흑사병으로 거의 절반 가까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소속감의 원천인 가족을 잃은 많은 이들이 외부에서 친근한 관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자신과 취향이 비슷하거나 외모가 비슷한 이들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로 친구입니다. 이때부터 친구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문헌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친구에게 자신의 일상과 감정, 영혼을 편지로 알렸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교회에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고, 반지를 교환했으며, 가문을 합치거나 마치 부부처럼 죽고 나면 바로 옆에 안장되기를 약속했습니다. 친족 관계가 아닌 이들이 서로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그 모임 안에서 빵을 나누고 노래를 같이 부름으로써 타인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고는 서로 의지했습니다. 먹을 것을 나누었고, 돈을 빌려줬으며,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이는 서로를 신뢰했기에 가능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 사람들이 타인으로 가득 찬 도시로 모이면서 우정은 더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농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산업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계절에 따라 함께 즐기지 못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여가를 보내는 장소도 농장이나 시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극장이나 카페처럼 돈을 내고 들어가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잡지를 읽으며, 혹은 예술을 감상하는 등 같은 취향을 소비하면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소속감을 주는 모임은 점점 더 공식적인 단체로 바뀌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인 남성의 절반 이상이 한 단체에 속해 있었고, 서로 음식과 술을 같이 하기 위해 일정한 비용을 냈으며, 그 비용은 사회적 보험의 역할을 했습니다. 제랄드 감과 로버트 퍼트냄은 19세기 미국에서 엘크스 클럽(Elks Clubs) 이나 오드펠로우스(Oddfellows) 그룹이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전후 미국은 새로운 소속감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1950년대 전무후무한 물질적 풍요는 개인주의와 사적 소비의 자기 만족적 문화로 이어졌습니다. 점점 더 많은 가족이 교외로 이동했고, 자신들의 소유물을 홀로 즐기게 되었습니다. 반면 이런 소유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교회나 볼링 클럽과 같은 다른 단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상품들이 그 시장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계발 서적이나 타파웨어(플라스틱 밀봉 용기) 파티, 그리고 대중매체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시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준사회적 미디어 소비가 처음으로 묘사됩니다. 1956년 사회학자 도널드 호튼과 리차드 볼은 논문 “대중 매체와 준사회적 관계”에서 그들이 “친밀감 쇼(personality show)”라 부른 새로운 종류의 라디오 및 TV 프로그램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시청자가 방송인을 가까운 친구처럼 여기도록 방송인이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들리게 제작한 형식의 프로그램입니다. 진행자는 거실이나 침실과 같이 친밀한 공간에서 이야기하며 행동이나 표정이 잘 보이는 구도로 앉아 있습니다. 때로 그는 시청자가 무언가 반응이라도 하기를 기대하는 듯 말하며,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매주 그 방송을 보거나 들으면서 자신이 정말로 “그와 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1950년대의 스티븐 콜베르 쇼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쇼들은 시청자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갔습니다. 예를 들어 1951년 라디오 쇼인 “외로운 여자(lonesome Gal)”는 이름 없는 한 여성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부끄럼 많고 소극적이고 외로운 연인에게 독백하는 내용입니다. “자기야 모르겠어? 나는 수많은 외로운 여자 중 한 사람일 뿐이야. 내 연인은 일요일을 미술관에서 보내는 남자, 센터럴 파크에서 건너편의 연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산책하는 남자야. 하지만 나는 다른 어떤 연인들보다도 더 운이 좋아.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있으니까. 내가 항상 당신만 생각한다는 걸 알아?” 호튼과 볼은 이 준사회적 관계가 외롭고 고립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회로부터 얻지 못한 소속감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최근의 경제 위기는 소속감을 위협하는 새로운 요인입니다. 음식이나 전자제품, 자동차의 가격은 내렸지만, 교육이나 양육, 의료비, 그리고 주거 비용은 크게 높아졌고, 이는 가족 관계를 더욱 위협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아이를 덜 낳으며 심지어 결혼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근무시간은 늘어났고, 생활의 안정성도 줄어든 지금,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건 친구밖에 없습니다. 과거 소속감을 제공하던 여러 단체도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퍼트냄이나 테다 스카치폴과 같은 학자들은 볼링 클럽이나 교회, 정치 단체에 참여하는 이들의 수가 점점 줄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특히 남성에게 친구 관계의 상실이라는 위기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2006년 발표된 한 연구는 1980년대 이래 중요한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줄고 있음을 보였습니다. 이는 개인화된 사회의 단면입니다.

2부로

veritaholic

Recent Posts

[뉴페@스프] 습관처럼 익숙한 것 너머를 쳐다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1 일 ago

‘사이다 발언’에 박수 갈채? 그에 앞서 생각해 볼 두 가지 용기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 공격을 벌인 뒤 그에 대한 반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 작전…

2 일 ago

[뉴페@스프] 점점 더 커지는 불평등의 ‘사각지대’가 있다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6 일 ago

선거제 허점 악용해도 견제할 방법, 저기도 없네?!

미국 대선에서는 주별로 배정된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집계해 과반(최소 270명)을 득표한 사람이 당선됩니다. 선거인단을 어떻게…

1 주 ago

계속 심각하니 어느새 간과하는 걸까, 저출생 문제

로스 더우댓(Ross Douthat)은 지난해 말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있는가?라는 칼럼을 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입니다. 저출생 현상이 서구 사회를 비롯한…

1 주 ago

선거 패자도 ‘정치 보복’ 걱정 안 해도 되는 미국

한국의 총선을 맞아 정치에서,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비판하기 전에 나와 우리…

2 주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