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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일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현금으로 결제를 할까?

은행과 테크 기업이 새로운 결제 시스템에 앞다투어 투자하고 있는 현재, 독일 소비자들은 과거의 결제 방식을 여전히 선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독일은 선진국 중에서 현금 사용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평균적으로 독일 사람들은 지갑에 123달러에 해당하는 현금을 소지하고 있는데 이는 호주나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소비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평균 현금의 두 배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면 독일에서 발생하는 거래의 80%가 현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46%에 불과합니다.

[결제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율]

아무도 왜 독일 사람들이 현금을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설문에 응한 독일 사람들은 현금을 사용하는 것이 지출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인들은 현금 사용이 가져다주는 익명성을 선호한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물론 독일 사람들의 현금 사용 빈도는 독일의 험난했던 통화 정책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초인플레이션은 1923년 그 절정에 달했고 그 당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화폐가치는 바닥에 떨어졌지요. 그 결과 당시 빵 한 덩어리의 가격은 4천280억 마르크였고 버터 1킬로의 가격은 대략 6조 마르크였습니다. 사람들은 일하다 말고 돈의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여러 가지 물건을 사기 위해서 서둘렀고 아무 쓸모 없는 은행 어음은 벽지나 연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통화 정책이 독일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은 독일을 상대로 엄격한 임금과 가격 통제를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점점 더 많은 경제 활동이 암시장으로 옮겨 갔습니다.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남기고 간 담배나 펜 등이 화폐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은 1948년 6월 20일에 화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때 독일인들은 당시 통용되던 화폐인 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s)를 도이칠란드마르크(D-mark)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화폐 전환 당시 10 라이히스마르크는 1 도이칠란드마르크의 비율로 교환되었는데 이 결과 개인들이 저축해 두었던 돈의 90%가 공중으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화폐의 도입은 사람들이 비축해 두었던 물건들이 다시 상점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었고 암시장의 역할도 감소시켰습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이때 단행된 화폐 개혁은 독일 경제를 소생시키는 데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이런 역사가 독일인들이 현금을 애용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한 가지 설명은 과거 초인플레이션의 경험이 여전히 많은 독일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행 위기를 겪은 국가에 있는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맡기기보다는 현금을, 왠만하면 미국 달러와 같은 외국 화폐로, 소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통화 불안정을 겪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경우도 현금 사용이 많은 편입니다. 핵심은 독일 사람들이 현금을 좋아해서 사용량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역사적 이유에서 독일 사람들은 빚을 내는 것을 혐오합니다 (독일어로 빚은 “죄진(guilt)”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독일에서 소비자 부채 비율은 무척 낮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주택구매용 대출을 신청하는 것을 무척 꺼리는데 이는 왜 독일이 선진국 중에서 가장 낮은 자가 주택 소유 비율을 가졌는지를 설명합니다. 2011년에 독일 사람 중에서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은 33%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들도 이를 즐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독일에서 발생한 결제 중 18%만이 신용카드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비율이 50%, 영국에서는 59%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무척 낮은 수준입니다. 독일인들의 현금에 대한 선호, 혹은 빚을 지는 것에 대한 혐오는 독일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래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독일 사업가들은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죠. (QUA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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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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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원문을 보니 "버터 1킬로의 가격은 대략 6조 달러 " 에서 6조 '달러'가 아닌 '마르크'여야 맞을 것 같습니다.

  • 각 나라마다 사회적 환경이 다르니 아무래도 다르겠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그다지 카드가 필요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더군다나 권총 강도같은 것도 없는 사회니까...
    미국은 권총 강도가 많아서 캐쉬어가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금고에도) 하면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남의 손을 탄 돈을 만지는 것을 꺼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한국에 비해 미국은 대중 교통등을 이용하면 참 더럽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도 그다지...

    근데 사실은 현금이 더 좋은 거 같습니다. 자기 씀씀이를 느낄 수가 있어서죠.

    참.. 그건 그렇고, 혹 은행의 폐해라던가 은행의 시장에서의 위치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 대한 것을 연구한 경제학자가 있을까요?
    겅제에 관심을 두고 가만히 보니, 신용 카드 회사도 문제지만, 은행이란 곳의 존재/존립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차피 이젠 이자율도 거의 0%이고.. 사실 은행의 사업 내용을 보면 상당히 부도덕하다고 보입니다.

    사회현상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현상을 연구한, 잘 안 알려진, 하진 그 바닥에선 유명한 쇼스타인 베블런 같은 사람이 있듯이, 경제학 쪽에서도 분명 이 은행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들도 많을 듯한데.. 은행에 대해선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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