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 타임스, James Kynge and Nian Liu)
중국은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중국 중심의 미래 신산업 표준을 정립하려 합니다.
자오허우린(Zhao Houlin)은 유엔 산하 국제 전기통신연합(ITU)의 사무총장입니다. 전기통신연합은 통신산업의 국제적인 규칙을 정하는 독립된 기구이자 글로벌 중재자입니다. 하지만 자오허우린 사무총장은 공공연히 모국인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합니다.
자오 사무총장은 중국의 관료 출신이며, 국제기구의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시진핑 중국 주석이 주도하는 해외 인프라 투자 프로젝트인 일대일로를 여러 차례 지지했습니다. 더불어, 자오 사무총장은 중국 통신 업계의 선두기업인 화웨이(Huawei)의 장비가 스파이 활동에 악용될 수 있다는 미국 정부의 비난에 맞서 화웨이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화웨이에 대한 의혹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나는 화웨이가 다른 기업과 동등한 사업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오 총장의 중국에 대한 충성심이 드러나는 분야는 통신 산업 표준입니다. 중국의 표준을 지나치게 옹호하기 때문이죠. 그는 특정 국가에 대한 편향 없이 “ITU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서하고 사무총장에 취임했지만, 통신과 인터넷 산업에서 중국의 입지가 확장되는 것을 반깁니다.
지난주 중국 관영 매체 인민일보(People’s Daily)는 자오 총장의 발언을 보도했습니다. “최근 ITU 표준과 관련한 회의에서 평가하는 중국의 기술적 역량은 이미 글로벌 선두권입니다. 국제사회는 중국이 유엔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자오 총장이 신산업의 표준을 정립하는 데 있어 중국의 통신 회사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다른 연설도 소개했습니다.
자오 사무총장은 보도에서 인용한 발언에 대한 언급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자오 총장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기술 표준을 둘러싼 치열한 지정학적 대립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간혹 기술 표준의 중요성이 간과되기도 하지만, 표준은 미-중 간 첨예한 갈등에서 결정적인 이슈 중 하나입니다.
표준은 현대 기술의 핵심적인 요소이지만 실체가 눈에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냉전의 핵심이 핵무기 경쟁이었다면, 앞으로 미국, 중국, 그리고 EU 사이의 경쟁은 주요 산업의 규정과 표준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입니다.
산업 표준의 상업적, 지정학적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알려졌습니다. 지멘스(Siemens)의 창업자인 베르너 폰 지멘스(Werner von Simens)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표준을 장악하는 자가 시장을 지배한다.”
산업 표준은 지난 수십 년간 소수의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결정됐습니다. 기차선로의 폭에서부터 소프트웨어, 인공위성, 휴대전화의 주파수, 전자 기기 작동방식, 데이터 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 분야의 규칙이 서구 산업 국가들이 주도하는 표준 관련 국제기구에서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관행을 깨뜨리려 합니다. 뉴욕의 싱크탱크인 미국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아담 시걸(Adam Segal) 디지털 및 사이버 프로그램 이사는 이렇게 예상합니다. “산업 표준은 미-중 간 신냉전의 주요한 전선입니다. 중국과 미국 모두 국제 표준 선점 경쟁에 대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아담 시걸 이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미-중 간 산업 표준을 둘러싼 패권 다툼이 신기술 분야에서 치열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의 산업이 두 블록으로 나뉠 수도 있다고 우려합니다. 과거 서유럽과 구소련의 철로 너비에 대한 표준이 달랐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서유럽 국가에서 옛 소련권 국가로 이동하는 기차 승객들이 열차를 갈아타야만 합니다. 비슷한 상황이 미-중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양국의 대립으로 새로운 기술 단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시걸 이사는 사물인터넷의 핵심적인 기반인 5G 통신망이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두 개의 블록으로 분할될 수 있다고 예상합니다. 그리고 미-중 간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인공지능 등의 분야가 단절되는 상황도 가능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시걸 이사는 이렇게 예상합니다. “몇몇 분야의 표준은 두 블록으로 단절될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분야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협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표출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곳의 기술에만 갇히지 않겠다고 하는 거대한 시장이 있다면, 양국의 테크 기업들은 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상호 호환되는 기술과 제품 개발에 대한 압박을 받게 되겠죠.
미국은 기술 표준을 둘러싼 다툼이 중국의 도발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전 국무장관은 “중국이 디지털 권위주의의 첨병”라고 비판했습니다.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부의장인 마크 워너(Mark Warner) 민주당 상원 의원도 중국의 위협을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중국이 차세대 디지털 인프라를 통제하고, 이를 통해 중국은 투명성, 의견의 다양성, 상호 호환성, 인권 존중이라는 미국의 가치와 상반되는 원칙을 강요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워너 의장은 지난 9월 온라인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10~15년간 미국의 리더십이 약해졌고, 미국의 가치를 반영하는 표준과 프로토콜을 제정하기 위한 영향력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틈을 타고 중국이 치고 들어와 중국 공산당의 입맛에 맞는 표준과 가치를 확산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을 언급하며, “중국 공산당이 조지 오웰도 놀랄만한 디지털 기술 통치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워싱턴의 다른 의원들도 나섰습니다. 데이비드 슈웨이커트(David Schweikert) 의원과 아미 베라(Ami Bera) 의원은 지난 6월 국제 표준에 대한 “미국 리더십 확립 법안”이라 불리는 초당적인 법안을 발의하며 중국이 세계 기술 표준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미국의 시각에서 중국의 도전은 크게 3가지 분야에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중국은 5G 통신과 AI 등 몇몇 신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 기술을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100개 이상의 국가에 수출하면서 중국의 산업 표준과 프로토콜에 들어오도록 유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유엔과 국제표준을 제정하는 국제기구에 영향력을 강화하며 자국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컨설팅 회사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trategy Analytics)의 양광(Yang Guang) 수석 연구원은 과거에는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었을 뿐 중국은 기술 표준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오랫동안 힘써왔다고 평가합니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 휴대전화와 무선 인터넷 분야의 독자적인 표준인 TD-SCMA와 WAPI를 채택했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서구 표준을 따라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표준 분야 마스터플랜 “중국 표준 2035”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 핵심적인 차세대 기술 분야의 표준화 목표가 담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전문가들은 이번 계획을 통해 산업 표준과 관련한 국제기구에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분석합니다.
존 시먼(John Seaman) 연구위원은 프랑스 국제관계 연구소와 뉴사우스 정책센터의 연구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중국은 이번 계획에서 민간과 군의 긴밀한 협력을 촉진하는 민군 융합(civil-military fusion) 산업 표준도 주요 주제로 다룰 것입니다. 이 분야는 중국 내에서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의 주요 국가, 특히 미국에 큰 파문을 가져왔습니다.”
민군 융합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기술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민간에서 개발한 기술을 활용한다는 계획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이를 직접 주도하고 있습니다. 시 주석은 군민 융합 발전위원회(Commission for Military-Civil Fusion Development)의 위원장을 맡고 있죠. 세부 계획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자 컴퓨터, 빅데이터, 반도체, 5G, 인공지능 등의 분야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시먼 연구위원은 “중국의 가장 큰 잠재력은 아직 표준이 개발되고 정립되지 않은 산업에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중국의 기술을 해외 시장에 적용해 실제로 활용할 수 있겠죠.”라고 전망했습니다.
중국의 기술 표준을 해외로 확장하기 위해 중요한 모티브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입니다. 자오 사무총장은 전기통신연합 블로그에서 일대일로가 참여국들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안길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습니다.
일대일로는 개발도상국에 도로, 철도, 항만, 공항을 비롯한 인프라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일대일로는 중국의 기술과 표준을 개발도상국에 확산하는 소위 “디지털 실크로드”의 일환입니다.
독일 싱크탱크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MERICS)의 레베카 아르세사티(Rebecca Arcesati)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디지털 실크로드와 연계한 5G 통신망과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활용해 개발도상국에 사이버 통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중국 기술표준 확산의 첨병은 “스마트시티” 입니다. 스마트시티는 도시의 수많은 기능을 자동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안면 인식 시스템, 빅데이터 분석, 5G 통신, 인공지능 카메라 등 기술 표준이 적용되는 다양한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자국의 산업표준을 세계로 확산하려는 중국의 목적에 들어맞습니다.
미국 국제 전략문제연구소(CSIS)의 조너선 힐만(Jonathan Hilman) 연구원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중국이 자국 기술을 다양한 국가에 수출하고 해외 시장에 적용하면서 바닥에서부터 표준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가 탁상공론으로 당장 중국의 기술표준을 채택하겠다고 결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기업과 많은 거래를 하고 중국 기술을 활용하게 되면 결국 중국의 표준을 채택하기로 기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잠금 효과(lock-in)가 나타납니다. 이미 적용하고 있는 기술을 바꾸려고 할 때 엄청난 전환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세르비아는 중국 스마트시티 프로그램에 가입한 국가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업체인 하이크비전(Hikvision)의 감시카메라를 사용하죠. 하이크비전은 신장 인권 탄압에 연루됐다는 의혹으로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카메라 제조회사입니다. 실제로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는 교통, 상하수도, 치안 서비스를 자동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시하려는 정부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 컨설팅업체 RWR 어드바이저리(RWR Advisory)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중국 기업들은 전 세계에서 116건의 스마트시티, 세이프시티 패키지 계약을 체결했고, 이 중 70개 국가는 일대일로에 참여한 나라였습니다. 스마트시티와 세이프시티의 주요한 차이점은 세이프시티가 주로 시민을 감시하는 목적이지만, 스마트시티는 다양한 도시 기능을 자동화하면서 감시 기능을 통합했다는 것입니다.
서유럽과 남유럽의 25개 도시들은 “스마트시티”와 “세이프시티” 프로젝트에 서명했으며, 동남아시아 16개 도시, 중동 15개 도시도 중국 기업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RWR 어드바이저리의 최고 운영 책임자인 앤드류 데이븐포트(Andrew Davenport)는 스마트시티가 내재한 보안 측면의 위협을 경고합니다. “스마트시티는 본질적으로 데이터 보안, 사이버 보안 측면에서 사생활 침해, 남용의 위험이 상당히 높습니다. 특히, 중국의 권위적인 법과 통치구조는 기업의 보안 리스크를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기술 표준을 해외로 확산하기 위해 수출 확대와 동시에 국가 간 협정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있습니다.
2019년 중국 표준화 발전 연차 보고서는 중국의 기술표준 확산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은 2019년 기준으로 49개국과 85개 표준 관련 협정을 체결했지만, 협정의 구체적인 수준과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를 통한 양자 협정뿐만 아니라, 국제 표준 기구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7년까지만 해도 164개국이 가입한 국제 표준화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요 위원회와 소위원회를 책임지는 중국 출신 인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중국은 국제 표준화기구의 6번째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됐고, 2013년에는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이어 기술관리 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선정됐습니다. 2015년 마침내 중국의 철강기업 임원이었던 장 샤오강(Zhang Xiaogang)이 국제 표준화기구의 첫 번째 중국 출신 의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전기 기술의 표준을 담당하는 국제기구인 국제 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위원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꾸준히 증가해왔고, 지난 1월 중국의 국가전력망공사(the State Grid Corporation of China)의 회장인 슈인비아오(Shu Yinbiao)가 회장으로 선출됐습니다. 국제 전기통신연합에서도 중국의 자오허우린이 사무총장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국제기구 내에서 중국의 대표성이 높아지면서 중국 기술 표준의 국제적인 영향력도 커지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기준으로 중국은 국제 표준화기구(ISO)와 국제 전기기술위원회(IEC)에 11개 사물인터넷 표준을 제안했습니다. 그중 5개는 채택됐고, 6개는 심사 중입니다.
중국 국가전력망공사도 성공을 거뒀습니다. IEC는 글로벌 에너지 연계를 위한 조정 표준을 채택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국가와 대륙 간에 흐르는 광대한 전력망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만약 이 제안이 실행된다면 초고전압 송전선 제조 분야의 글로벌 선두기업인 중국 국가전력망공사가 엄청난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표준 관련 국제기구에 대한 입김이 세지면서, 중국이 글로벌 기술 표준에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유럽은 초강대국의 경쟁 속에서 압박을 받을 것입니다.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의 알르세사티 연구원은 현재 상황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중국 내 사이버 보안이 권위적이고 불투명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중국의 표준과 플랫폼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미국의 전략은 데이터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디지털 영역에서 중국의 기술을 전면적으로 단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미-중 사이에서 유럽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질 것입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시먼 연구위원이 언급한 기술 단절입니다. 표준 협력이 중단되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뉠지도 모릅니다. “페이스북을 이용해 텐센트 위챗 유저와 대화하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연히 연결이 안 되겠죠. 미-중 두 블록 사이의 기술 장벽은 개인 간 소통의 단절에 그치지 않고, 산업 전체의 소통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데이브포트 RWR 어드바이저리 운영책임자도 비슷한 위험을 경고합니다. “만약 미국이 국제기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데 적극적으로 맞선다면 중국도 똑같은 대응할 것입니다. 결국 산업 표준이 더 심하게 양분되는 결과를 낳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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