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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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총리 출신의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역사를 크게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시기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대표되는 “양극단”의 시대죠. 안보리는 거의 기능하지 못했지만 당시의 대치 상태에는 일정 정도 예측 가능한 부분이 있었고, 유엔은 헌장에도 없는 평화유지와 같은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는 혁신을 발휘하기도 헀죠.
공산권의 붕괴 이후로는 아주 짧은 “단극”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독주가 거의 견제받지 않던 시절입니다. 안보리 역시 창시자들이 의도했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국제 질서”를 축하했고, 유엔은 대형 참사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책무”라는 원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중동 사태와 아프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지쳤고, 국내 문제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서구가 다른 국가에게 서구의 가치를 힘으로 강요하는 행태에 대한 반발심이 늘어났고, 러시아와 중국이 점점 더 미국 우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재개된 라이벌 관계로 인해 안보리는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구테흐스 총장은 이 세 번째 시기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아직은 ‘다극’ 상태가 아니지만 혼란스러운”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각축의 장이 늘어나고 있는 극적인 변화를 볼 때 혼란의 정도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경제를 예로 들면, 2000년 이후 중국이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 이하에서 16%로 늘어났습니다. 알리바바, 텐센트, 화웨이 같은 테크 거물들이 중국의 디지털 인프라를 전세계, 특히 개발도상국에 널리 퍼뜨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수출국이고, 가입이 늦어졌음에도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WTO를 방어하는 수호자 노릇을 하고 있죠.
금융 부문에서도 여전히 달러화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위안화 역시 입지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구에서 중국은 여전히 과소대표돼 있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 엄청난 차관을 해준 중국은 앞으로 IMF의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 이코노미스트 특집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국제 협력 거버넌스의 상징인 유엔이 앞으로 열강들 간의 경쟁에서 의의를 잃어가게 될까요? 유엔을 아주 포기해버리기는 시기상조입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과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 진영이 리더십을 회복하고 어려운 개혁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다국적 시스템에는 중요한 강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꼭 필요하다는 것죠. 가장 큰 문제는 국가 간 협력 없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말이죠. 세계는 백신 개발과 경제 회복, 약자 보호에 함께 나서야 합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출신의 공화당원인 유엔세계식량계획의 수장 데이비드 비즐리는 “엄청난 규모의 다중 기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기후 변화와 같은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핵 확산의 위험도 다시 커지고 있죠.
유엔의 인기도 빼놓을 수 없는 강점입니다. 물론 부끄러운 실수도 많이 했죠. 르완다와 스레브레니차의 학살을 막지 못했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아이티에 콜레라를 퍼뜨리기도 했고, 평화유지군에 의한 성범죄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이라크와의 석유 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은 18억 달러 규모의 사기극을 낳기도 했죠. 하지만 여전히 유엔에 대한 신뢰도는 각국 정부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작년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32개국에서 유엔에 대한 호감 의견은 61%, 비호감 의견은 26%로 나타났습니다. 미국에서도 민주당과 공화당 간 의견 차이가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다수가 유엔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실시된 또 다른 조사에서는 미국이 국제 문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한 미국인이 70%에 달해 사상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미국이 다시 국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모두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힘든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루 아침에 다자주의에 대한 생각을 바꿀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나라 밖 문제에 얽히는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의구심은 그 뿌리가 미국의 역사 만큼이나 깊습니다. WTO와 NATO 등에 대한 실망감은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전부터 쌓여오고 있었죠. 대통령이 부추긴 국내의 분열은 세계 무대에서의 리더십에도 위기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11월 대선에서 조 바이든이 당선된다면,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는 되지 못하더라도, 뭔가를 다시 시작하는 계기 정도는 될 수 있겠죠. 작년 뮌헨 안보회의에서 바이든이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요.
유엔은 75주년을 다자주의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로 삼고 싶어 했지만, 코로나19가 모든 의제를 삼키고 말았죠. 하지만 코로나19가 만들어낸 기회도 있습니다. 위기를 계기로 국가들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기보다 강화하는 쪽을 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의 위기 대응과 미래에 대한 계획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은 1945년 유엔을 창시한 이들이 이루어낸 것과 같은 수준의 성취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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