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적 사고는 1930년대 독일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바꾸었고, 곧 이어 외교 정책 역시 운명적인 길로 인도합니다. 1차대전과의 결과인 평화조약은 독일인들의 반 슬라브 인종주의를 강화했고 사회진화론자들의 전쟁찬양은 이미 독일 정치지형에서 우익의 핵심주장이 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에 의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러시아와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적대감을 강화시켰습니다. 1차대전에 승리한 연합군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면서 독일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동부 독일의 넓은 지역을 폴란드에 복속시킨 것도 문제였습니다. 어떤 독일 정부도 그들이 영토를 잃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는 우익 정치인들이 폴란드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참전용사 모임인 강철헬멧(Steel Helmet)은 공개적으로 폴란드와의 전쟁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모호한 주장인 독일민족의 늘어난 인구는 더 넓은 “삶의 공간(living space)”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1931년 민족주의자들의 회합에서 그들의 지도자 알프레드 후겐버그는 독일 민족은 “위선적 평화주의(hypocritical pacifism)”가 아닌 “적극적 자립(energetic self-help)”에 의해서만 “자유와 공간”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후겐버그는 독일도 아프리카의 식민지가 필요하며, 또한 새로운 땅을 위해 동쪽으로 “활발한 레이스”를 “과거의 독일의 경계를 넘어선, 오직 독일에 의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동쪽 땅의 재구성”을 통해 펼칠 것을 주장했습니다. “적극적 자립”이란 다름 아닌 다윈주의로 미화된 전쟁의 또다른 표현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My struggle, Mein Kampf)”에 이런 급진적 생각들에 자신의 생각을 더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적 넌센스”라고 이름 붙인 평화주의에 대한 긴 반박 끝에 그는 국제 관계에 대한 자신의 진화론적 관점을 설명합니다. “누구든 살고자 하는 이는 싸워야 하며, 이 영원한 투쟁의 세계 속에서 싸움을 거부하는 이는 살아갈 자격이 없다.” 그에게 전쟁에 대한 반대는 “경쟁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류의 진보를 위한 선결조건”인 “가장 우수한 민족의 승리를 방해하는”것이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독일은 독일인에게 너무 좁았습니다. 독일은 다른 민족의 “종 노릇”을 하느라 “지구에서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세계를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사라질 것이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더 넓은 땅에 대한 욕망,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열등함에 대한 확신을 자신의 외교정책에 반영했습니다. 러시아는 “멸망 직전”이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땅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열등한” 러시아는 오직 독일의 지배층의 지도를 통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공산주의자 – 히틀러는 사실 유대인이 공산주의를 만들었으며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같이 취급했습니다 – 에 의해 독일적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주인을 죽이는 미생물로, 곧 “영원한 기생충, 흡혈동물, 가장 널리 퍼진 세균”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를 지배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유대인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안정적인 정부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독일이 쉽게 소련(Soviet Union)을 정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의 마음속에서 독일이 소련을 정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땅과 자원이 독일을 위대한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조종하는 공산주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세계 정복 계획은 본능적이며” 따라서 이 위험은 “항상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은 다른 국가에 침투해 그들을 속에서부터 썩게 만드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거짓말, 중상, 오염, 분열을 이용해 자신의 적이 피의 절멸을 겪게 만든다”고 썼습니다. 그는 또 “유대인”이 수세기에 걸쳐 다른 민족들에게 몰래 해를 끼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러시아 공산혁명은 그런 노력의 한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히틀러는 최대 2,500만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소련에 대한 집단학살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완전한 절멸 역시 지시했습니다. 독일 군대는 그의 지시를 능동적으로 따랐습니다.
비록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이론을 완전히 받아들인 장교들의 수는 거의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수가 비유대주의와 슬라브족에 대한 인종주의, 그리고 반공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1941년 소련침공과 수백만명의 포로학살 및 무자비한 약탈을 반대한 장교는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해 3월 침략군의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모든 병력은 이 투쟁이 민족과 민족사이의 것이며, 따라서 잔인함(harshness)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한다”고 연설했습니다. 5월, 탱크 부대를 이끄는 에리히 회프너는 자신의 부대에게 전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러시아와의 이 전쟁은 실로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독일과 슬라브족의 오랜 투쟁의 연속이며 유럽 문명을 모스크바-아시아 문명과 유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그는 “적을 완벽하고 무자비하게 전멸시키겠다는 강철의 의지”를 통해 “전대미문의 무자비함”을 보여야한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6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고 “유대-공산주의” 음모론을 격파하는 동안 “병영 편지(Bulletin fo rthe Troops)”는 이들이 사용할 잔인한 방법들을 정당화했습니다. 한 기사는 소련군의 공산당 장교들 중 유대인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자는 유대인을 동물적이라고 묘사하며 “이것은 동물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옥을 현실화한 인간이며 모든 고상한 인간성에 대한 광신적 증오를 인격화한 것이다. 이는 고상한 혈통에 대한 아-인간(sub-human)의 반란이다.”
히틀러가 소련의 유대인만이 아니라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학살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독일 시민 엘리트들이 독일군을 도와 자신의 계획을 수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만명의 공무원, 전문가, 기업가 그리고 몇몇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 중 다수는 나치가 아니었지만 학살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 아니 참아낼 수 있을 정도 만큼의 인종주의, 반 유대주의, 그리고 광신적 반공주의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의 참여를 쉽게 만들어 준 것은 그들이 실제 살인에 손을 더럽힐 것을 요구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책상뒤에 숨어서” 학살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들은 폴란드와 소련으로 보내져 그들의 시야 바깥에서 죽어갔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적어도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5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나치와 독일 지배층에 속하지 않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총살부대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가까이에서 피범벅이 된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독일의 관료들과 다르게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양심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부인과 아이를 가진 남자였습니다.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무방비의 시민을 학살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부로
(위의 글은 댄 맥밀란의 책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설명(How Could This Happen: Explaining the Holocaust)”을 저자가 직접 축약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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