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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성범죄 수사, 본질을 잊지 말아야

BBC의 유명 방송 진행자 지미 새빌(Jimmy Savile)이 수 십년 간 강간과 폭력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건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묻혀 있었을리가 없다며,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새삼스럽게 드러난 사실은 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낙인이 여전하고,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알리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나이젤 에반스(Nigel Evans) 의원을 비롯한 여러 유명 인사들이 최근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자, 무고한 사람에게 성범죄자 오명을 씌운 검경에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범죄 용의자의 신원을 밝히지 말자는 의견도 재등장했죠. 성범죄 용의자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은 숨어있는 추가 희생자들을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살인 등 다른 범죄 사건의 용의자들의 신원도 똑같이 공개되고 있고요. 그러나 새빌 건으로 이미 욕을 먹을만큼 먹은 검경은 민심을 되찾기 위해 이런 요구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는 위험합니다. 조금만 이성을 되찾고 숫자들을 살펴보면, 성범죄 사건에서 무고한 사람이 혐의를 쓰는 일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영국에서 한 해 평균 강간 피해자는 98000명에 달하지만, 사건 접수 건수는 15000여 건, 기소 건수는 2300여 건에 불과합니다.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뜻이죠. 이에 반해, 작년 한 조사에 따르면 17개월 간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혐의를 받은 사례는 전체 강간 사건의 0.6%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반스 의원의 혐의가 벗겨졌다고 해서, 의회 내 성범죄 문제를 가볍게 보아서도 안됩니다. 의회에서 일하는 여성의 3분의 1이 성희롱을 겪은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핀란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범죄라는 것이 남성 중심의 위계 질서 내에서 권력에 견제가 가해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범죄라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위계와 권력이 존재하는 한 학교나 종교 단체 등도 성범죄의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성범죄의 피해자는 주로 여성이지만, 남성들도 얼마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의회에서 일하는 남성 10명 중 1명이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밝혀지기도 했죠. 미군 내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 대처 경험이 여성에 비해 부족한 남성들은 성희롱을 당할 경우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남성 강간 피해자의 존재 자체를 터부시하는 사회 풍토도 여전합니다. 남성 강간 피해자들은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침묵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성범죄 문제 해결에는 수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갈 길이 멉니다. 새빌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얻은 교훈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나설 때 문제가 드러나고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게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성범죄 수사가 위축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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