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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과학에 기대고 있는 와인 감정(wine tasting)

프랑스 보르도의 최고급 밭뙈기 그랑끄뤼(grand cru)에서 난 포도로 만들었다는 고급와인 맛은 그저 그랬는데 동네 와인 가게에서 반주로 마시려고 산 $15 짜리 와인은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입맛이 저렴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와인의 맛과 풍미가 가격과 일치하지 않는 걸까요? 전문적인 와인 감정사들로부터 “맛있다”는 호평을 받고 가격이 훌쩍 오른 와인들은 정말로 다 맛이 뛰어날까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작은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혹슨(Robert Hodgson) 씨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해에 생산한 같은 와인이 어느 감정 대회에서는 극찬을 받고 또 다른 대회에서는 혹평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혹슨 씨는 캘리포니아 주 와인 경연대회(California State Fair Wine Competition) 조직위원회에 한 가지 실험을 제안합니다. 상표를 가리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 와인 감정사들에게 똑같은 와인을 세 차례 마시게 한 뒤 같은 와인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 살펴본 거죠. 맛을 100점 만점의 점수로 평가하는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유명한 감정사들의 점수도 대개 같은 와인에 대해 평균 ±4점의 편차를 보였습니다. 한 번은 86점을 줬다가 조금 있다 마시고 나서는 94점을 주는 식인 겁니다. 1점 차이로 우승 와인과 그저 그런 와인이 갈리는 대회에서 8점은 하늘과 땅 차이죠. 같은 와인에 대해 편차가 ±2점 이내로 비교적 일관적인 평가를 내린 감정사들은 전체의 10%에 불과했고, 지난해에는 제대로 평가를 내렸던 감정사들이 올해는 들쭉날쭉한 평가를 내리기 일쑤였습니다. 혹슨 씨는 결국 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얻는 ‘올해의 와인’과 같은 칭호들은 ‘순전히 운’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분명 와인의 복잡한 향과 풍미를 감별해내는 데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한 자리에서 100가지 와인을 조금씩 마셔보고 맛을 비교해 순위를 매기는 일을 ‘과학적으로’ 해내는 건 인간의 능력 밖입니다.”

혹슨 씨는 많은 와인애호가, 전문가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실험을 한 결과는 이미 여러 차례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떤 학자가 한 실험에서 똑같은 와인을 고급와인 병에 담아 따라줬을 때와 그냥 저렴한 와인이라고 알려주고 따라줬을 때 맛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비싼 와인에는 독특한 풍미, 깊은 맛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비싼 돈을 주고 비싼 와인을 사마시는 사람들은 그 맛을 오롯이 느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허트포드샤이어 대학의 와이즈만 교수가 실시한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 참가자 578명 가운데 한 병에 1만 원이 안 되는 저렴한 와인과 2만 원이 넘는 조금 더 비싼 와인을 맛만 갖고 구분한 사람은 화이트와인 53%, 레드와인 47%에 그쳤습니다. 그냥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비싼 와인, 뒷면이 나오면 저렴한 와인이라고 찍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인 셈이죠.

와인 맛을 감정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뭘까요? 당연히 실제로 엄청나게 복잡하고 미묘한 와인의 화학 성분이 한몫 할 겁니다. 와인은 크게 단맛, 신맛, 쓴맛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데, 각각의 당이나 산, 탄닌 등 성분의 종류가 포도에 따라, 그 포도가 자란 토양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여기에 발효 과정에서 쓰는 이스트나 첨가하는 향료가 다르고, 숙성할 때 쓰는 통이 다르니 오묘한 맛의 차이로 따지면 같은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이라도 맛이 같을 수가 없는 셈입니다. 또한 와인맛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후각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향입니다. 이 향만 해도 알려진 것만 400 가지가 되니, 아무리 반복적인 훈련을 하더라도 미세한 차이까지 확실히 분간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또한 와인을 마시는 사람의 그날 기분, 와인잔, 같이 먹는 음식, 누구와 함께 먹는지 등 와인맛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와인마다 그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적정온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대륙의 샤도네이 화이트와인을 시원하게 마신다고 너무 차게 해놓고 마시면 참나무향밖에 안 날 겁니다. 반대로 레드와인은 너무 미지근하게 먹으면 알코올 향이 강해 와인의 풍미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국 왕립화학협회의 와인 전문가 허친슨(Dr James Hutchinson) 박사는 자기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찾는 게 와인을 제대로 마시는 지름길이라고 말합니다.

“(전문 감정사들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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