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10월 4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 이제 선거 결과를 아는 만큼 미국 역사상 최연소 부통령이 될 J.D. 밴스의 주장에 주목해서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미국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우편으로 부재자 투표와 사전 투표를 시작한 주도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밤에는 두 당의 부통령 후보 J.D. 밴스와 팀 월즈가 TV 토론에서 맞붙었습니다. 지난달 트럼프와 해리스가 벌인 대선 토론에 비하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근래 보기 드문 “정책 토론”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토론에 임하는 태도나 주장을 펴는 모습은 밴스가 더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알맹이를 따져보면 사실관계에 맞지 않거나 논리를 억지로 왜곡한 발언들은 밴스 쪽에서 훨씬 많이 나왔으므로 월즈가 딱히 진 토론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늘은 부통령 후보 토론 관전평을 준비했습니다.
부통령 후보의 미션: 러닝메이트에게 짐 되지 않기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 중에 부통령을 두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정치를 볼 때 부통령의 존재는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통령의 권한이 명확하게 정의돼 있지도 않은데, 미국 헌법 2조에는 부통령의 역할은 주로 상원의 의장이며, 대통령이 사망할 때 그 자리를 승계한다는 정도만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부통령이 상원 의장으로서 표결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상원의원 100명이 정확히 50:50으로 나뉘어 마지막 캐스팅 보트가 필요할 때뿐이며,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권력을 이어받는 절차도 1967년 수정헌법 25조가 통과되기 전까지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부통령의 역할과 권한, 존재감은 행정부에 따라, 또 부통령의 그전까지 경력이나 관심사에 따라 매번 달라졌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선거에서 대선 후보를 보좌하는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부통령 후보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은 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 부통령 후보 토론을 앞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기가 뽑은 러닝메이트 밴스에게 별다른 응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언급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어떤 점을 기대하는지 묻자 짧게 상투적으로 답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역할과 권한이 모호한 신세(?)다 보니, 부통령 후보 토론에 임하는 후보들이 완수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목표는 대통령 후보에게 짐이 될 만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겁니다. 즉, 자신을 뽑아준 러닝메이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do-no-harm)이 중요합니다. “잘하는 것”보다도 “큰 실수 안 하는 것” 혹은 “눈에 띄게 못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대선 후보 토론보다는 아무래도 관심을 덜 받는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상대방에 정치 공세를 펴기 좋은 소재를 던져주면 남은 선거 기간 내내 이를 만회하기 쉽지 않습니다.
올해 선거에서는 그나마 부통령 후보 토론이 조금 더 관심을 받았습니다. 트럼프는 사실상 적수가 없던 당내 경선에서 후보 자리를 확정 지은 뒤 한참 있다가 전당대회 첫날에야 러닝메이트를 발표했고, 해리스는 심지어 선거를 100일 남짓 앞둔 시점에 갑자기 대통령 후보가 돼 부랴부랴 러닝메이트를 찾아야 했습니다. 유권자들이 제대로 지켜보고 검증할 기회가 부족했던 두 부통령 후보 사이의 토론은 그 자체로 관심을 끌 만했습니다. 여기에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 전에 세 차례 TV 토론을 벌이던 관행을 깨고 이번에는 한 번밖에 토론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해리스 캠프에선 추가 토론을 제안하고 있지만, 트럼프 캠프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화요일 밤 토론은 양 캠프가 정책과 비전을 두고 벌이는 마지막 토론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위에서 말한 “러닝메이트에게 해 끼치지 않는 것”이란 기준에서 보면 두 후보 모두 토론을 잘했습니다. 밴스는 트럼프가 지난 대통령 후보 TV 토론과 여러 인터뷰에서 자세한 설명 없이 나열한 주장과 공약을 나름대로 차분하게 정리해 설명했습니다. 꽤 극단적인 정책들을 이야기할 때도 표정과 말투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대부분 질문에 충실히 답했습니다. 토론에 임한 태도와 시청자들에게 준 인상만 따지면 밴스가 판정승을 거뒀다고 할 만한 밤이었습니다.
월즈는 특히 토론 초반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말을 더듬거나, 했던 말을 또 하거나 논리 전개가 이리저리 널을 뛰기도 했습니다. 질문에 맞는 인상적인 답변을 내놓기보다는 해리스 캠프에서 수없이 반복한 구호를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론 이건 트럼프가 그동안 정책에 관해 자세히 말한 적이 없어서 밴스가 상대적으로 더 친절하게 정책을 설명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감과 함께 자기 리듬을 찾았고, 결국 토론 마지막에 이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도 월즈였습니다.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라는 매체에 올라온 칼럼의 제목은 “밴스가 이겼지만, 그렇다고 월즈가 진 건 아니다”였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두 후보가 치열하게 맞붙은 쟁점을 주제별로 나눠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쟁점 1: 이민
미국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하는 이슈는 경제입니다.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 물가가 기록적으로 치솟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트럼프와 해리스 후보의 정책과 공약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고 비교되는 것도 경제 정책입니다.
그런데 밴스가 이날 토론에 “만능 재료”로 준비해 온 이슈는 경제보다도 이민이었습니다. 이민 문제도 경제와 마찬가지로 바이든 행정부 초기에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면서 악화된 건 맞습니다. 미국으로 오려는 이민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정당한 절차를 밟고 심사하는 데 필요한 인력은 부족했고, 합법적인 거주 요건을 채우지 못한 채 살게 된 이민자가 갑자기 몰린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 곳의 지역사회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밴스는 이에 관해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전임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폐기하면서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아주던 트럼프의 행정명령까지 모조리 폐기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해리스 부통령이 집권 초기 이민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철저히 실패했다며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해 월즈는 민주당이 마련해 온 “모범 답안”을 제시합니다. 올해 공화당 소속의 강경 보수로 분류되는 제임스 랭포드 의원이 주도해서 작성한 초당적인 이민법 개혁안을 통과 직전에 물거품으로 만든 게 바로 트럼프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겁니다. 이민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을 만들어 예산과 인력도 확보하고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제도의 허점을 보완해야 하는데, 의회가 나서서 그렇게 했지만,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민 문제를 쟁점으로 삼기 위해 이를 망쳐놓았다는 거죠.
이 주제에 관한 토론 자체는 새로운 내용이 없는, 예상된 공방이었지만, 선거의 향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합주 유권자들이 보기에는 정책과 논지를 설명하는 밴스의 태도가 더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쟁점 2: 경제 – 집값 얘기하다가 이민자 탓
딱히 인상적인 공방이 없던 이민 문제를 첫 번째로 소개한 건 이후 토론에서 밴스가 전혀 다른 주제에 관해 논의하다가도 난데없이 문제의 원흉으로 “불법 이민자”를 꼽았기 때문입니다. 밴스가 든 주장의 근거 중에는 사실관계가 틀렸거나 논리적인 비약이 심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경제 문제에 관한 토론을 벌이다가 집값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팩트체크를 담당한 기자들은 화요일 밤에 정말 쓸 거리가 넘쳐나 즐거운 비명을 질렀을 겁니다. 밴스의 이 주장에 관해서는 미국 언론의 팩트체크를 자세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밴스는 집값에 관한 토론 중에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연구(Federal Reserve study)를 인용”했다며, “늘어나는 이민, 특히 급증하는 불법 이민자와 집값 상승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선 밴스가 언급한 연준의 연구는 데이터를 분석해 얻은 증거를 바탕으로 작성한 연구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닙니다. 연준 이사 가운데 한 명인 미셸 보먼이 지난 5월 매사추세츠주 금융협회 연례행사에서 한 연설 말미에 잠깐 언급된 내용입니다. 심지어 보먼은 불법 이민자는 고사하고 이민자가 집값을 올린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보먼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려면 여러 단계 논리를 뒤틀고 전제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보먼의 연설 내용 중에 밴스가 아마도 곡해의 소재로 삼았을 법한 부문의 문단 전체를 번역해 보겠습니다. (연설 전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비스에 대한 소비가 수요가 계속 높게 유지되고, 이민자가 계속 늘어나고, 노동시장도 계속 경직된 상태가 이어지면 주요 서비스 부문의 인플레이션이 계속 높게 유지될 위험이 있습니다. 현재 저소득층 임대주택 등 저렴한 주택 재고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부 지역으로 신규 이민자가 유입되면 추가로 집을 지어 주택 공급을 늘릴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걸 감안하면, 임대료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임금 상승률은 4~5%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추세적인 생산성 증가를 고려할 때 2% 인플레이션 목표에 부합하는 속도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입니다.
이 중 두 번째 문장에서 현재 주택 재고가 부족하고, 공급이 더디다는 맥락을 제거하고, “신규 이민자”를 “불법 이민자”로 슬쩍 바꿔치기하면, 이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키운 해리스를 공격할 근사한 무기가 됩니다. 연준 이사가 개인 자격으로 연설 중에 가볍게 언급한 내용을 마치 미국 중앙은행이 발표한 연구로 둔갑시켜 소개한 것도 문제지만, 언급하지도 않은 “불법 이민자”를 슬쩍 끼워 넣은 부분이 가장 큰 문제이자, 뻔뻔한 선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민자란 미국 밖에서 온 외국인뿐 아니라 다른 지역, 다른 동네에서 거주지를 옮겨 온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밴스 본인의 가족도 켄터키주에서 오하이오주로 이사 갔으니, 오하이오주 집값을 올린, ‘환영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됩니다.
팩트체크 매체 폴리티팩트는 밴스가 집값과 이민자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빠뜨린 부분이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제대로 된 경제학 연구들은 일제히 미국 집값 문제의 원인으로 공급 부족을 꼽습니다. 쉽게 말해 집을 충분히 안 지어서 공급이 부족해지니 집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더 많이 지을 수 있게 과도한 규제가 있다면 풀어주고, 필요하다면 집 짓는 업체들을 지원해야 하겠죠. 그런데 집을 누가 짓나요?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짠 도면에 따라 로봇이 집을 짓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당연히 사람이 짓습니다. 그런데 주택 건설 노동자의 30%가 이민자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합법적으로 미국에 살고 일할 권리를 취득한 사람들일 테고요. 밴스는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밴스는 토론 내내 이런 식으로 명백한 사실들 사이에 교묘한 왜곡과 침소봉대를 거친 거짓말들을 끼워 넣어 만든 논리로 주장을 뒷받침했습니다. 총기 문제를 논의하다가 문제를 불법 이민자 중에 범죄 조직이 끼어 있거나 불법 이민자 때문에 치안이 나빠진 탓으로 돌렸고, 펜타닐과 같은 합성 마약이 미국에 대거 들어온 것도 불법 이민자 탓,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는 것도 불법 이민자들이 싼값에 몰래 불법으로 일을 하거나, 노예 노동을 버젓이 허용하는 중국 같은 나라에서 물건을 수입해 오는 탓에 가격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전부 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논리에 왜곡과 비약이 가득한 주장입니다.
전문 번역: “나도, 그도 흙수저였는데 우리의 인생 경로는 어디서부터 달라진 걸까?”
쟁점 3: 또 경제 – “상식과 지혜가 부족한 전문가들”
경제와 관련한 토론 중에 또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두 후보가 경제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 장면입니다. (오늘 번역한 뉴욕타임스 칼럼이 정확히 그 점을 짚은 글입니다.) 먼저 월즈가 과학을 부정하고, 전문가의 분석과 조언을 무시하는 트럼프를 겨냥해 “심혈관계 수술을 받으려면 자칭 전문가인 트럼프를 찾아가지 마시고, 메이요 클리닉의 전문의를 찾아오시라”고 공격했습니다. (월즈는 메이요 클리닉이 있는 미네소타주 주지사이며, 메이요 클리닉이 있는 지역구에서 6선 하원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러자 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칩니다.
주지사님, 방금 전문가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바로 그 똑똑하다는, 배운 사람이라는 전문가들이 지난 40년간 뭐라고 말했습니까? 제조업 생산 기지를 (인건비 싼) 중국 같은 나라로 옮기면 물건값이 싸져서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라고 말했죠. 모두에게 이득이 됐나요? 제가 나고 자란 애팔래치아 지역의 경제는 폭삭 주저앉았어요. 가족도, 공동체도 다 무너졌고요. 그 잘난 전문가란 사람들요, 대단한 박사 학위는 있을지 몰라도 보통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상식과 지혜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미국을 망가뜨리는 사람들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상식과 지혜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 토론에서 밴스가 가장 잘한 발언을 꼽으라면 저는 이 부분을 꼽겠습니다. 제가 이 주장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이 발언은 공화당이 공략해야 하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두 집단이 다른 의미에서 동시에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지금의 트럼프를 있게 한 핵심 지지층인 러스트벨트의 백인 유권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입니다. 애초에 밴스가 부통령 후보이자, 나아가 마가(MAGA) 운동의 차세대 기수로 낙점된 이유도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력과 정견을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는데, 이를 그대로 보여준 발언입니다.
나아가 트럼프와 공화당에 중요한 부자 후원자들도 마음에 들어 할 말입니다. 밴스는 노동자들과 이윤을 공정하게 나누지 않는 기업이나 월스트리트 자본을 비롯해 이른바 세계화에 앞장선 엘리트를 강력히 규제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자 후원자들이 왜 저 말을 좋아할까요? 이건 저 발언에 곧이곧대로 동의해서가 아닙니다. 대신 저 말을 통해 경합주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어 트럼프와 밴스가 선거에서 이기면, 곧 해리스와 월즈가 선거에서 지면 자신들이 꿈꾸는 규제 완화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쓴 베스 매이시는 같은 문제를 다른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세계화는 한 나라 안에서도 승자와 패자를 분명하게 나누었는데, 여기서 발생한 문제를 세계화 자체를 악마화하고 이전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대신 세계화로 피해를 본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주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매이시는 주장합니다. (바이든과 해리스, 그리고 토론에서 “나는 노조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월즈의 생각도 여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공교육을 강화해서 (밴스도 덕을 본)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데, 트럼프와 밴스는 반대로 전문가를 경멸하고 공공 부문을 축소하거나 없애는 걸 능사로 여겨서 문제라고 매이시는 지적합니다.
사실관계를 꼼꼼히 따져보면 논리적 완결성에서 밴스의 주장은 흠결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프로젝트 2025에 관해 설명할 때 소개한 유발 하라리의 분석처럼 복잡한 사실을 파헤치고 분석해 진실에 다가가는 데는 많은 품이 듭니다. 그보다는 밴스처럼 “세계화를 주장한 전문가들은 미국인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으므로 순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걸 믿는 편이 쉽습니다.
쟁점 4: 임신중절권
임신중절권은 대통령 선거뿐 아니라 상·하원 선거에서도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의제입니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임신중절권처럼 이념적으로 극렬히 대립하는 이슈에 있어서 트럼프보다도 오히려 밴스가 더 강경한 보수적 정책을 지지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임신중절권 문제는 대선 토론에서 트럼프가 해리스를 상대로 고전한 주제이기도 했고요.
밴스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미국 대법원은 임신중절권을 폐기한 게 아니라, 주마다 직접 법과 규칙을 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준 거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흥분해서 고함을 친 트럼프보다는 차분하게 논리를 펴는 밴스의 말이 더 잘 들리기는 했지만, 월즈는 선택권 운운하는 건 궤변이라며 맞받아쳤습니다.
여성이 아이를 뱄을 때 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은 철저히 본인의 뜻에 따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거 자체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게다가 임신 중에 문제가 생겨서 산모의 건강이 위험해지면 그때 치료를 받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예요. 위험 여부를 판단하고 적합한 치료법을 선택해 제안하는 건 전문가인 의사가 할 일이고요. 그런데 이 의사결정 과정에 갑자기 정부가 끼어들게 만든 게 바로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이고, 지금 공화당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뒤로 산모 사망률이 치솟았어요. 그걸 왜 주별로 선택하게 합니까? 미국이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아플 때 치료받아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약받는 나라라는 사실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쟁점 5: 민주주의와 1월 6일 의사당 폭동, 그리고 선거 승복
마무리 발언 전에 다룬 마지막 주제는 “민주주의를 향한 위협”이었습니다. 사실 트럼프가 지난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면 논의할 필요도 없는 주제이자, 밴스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였을 겁니다. 트럼프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 2020년 선거에서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선거 결과를 최종 확인하는 절차를 무력으로 가로막으려다 발생한 1월 6일 의사당 폭동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을 빼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번 선거도 “공정하게 진행된다는 게 보장돼야”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024년 미국 정치의 난맥상의 뿌리도 결국,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의 바른 토론이었다는 평가가 많은데, 이 장면은 예외였습니다. 밴스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2020년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단연 이번 토론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만한 장면인 만큼 직접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전체 영상 중에 1시간 28분 48초부터입니다.) 토론의 쟁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진행자가 밴스 후보에게 묻습니다.
“2020년 선거 결과를 후보께서 부통령이었다면 추인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셨었죠? 2020년 선거 결과는 심지어 미국 50개 주의 모든 주지사가 다 맞다고 추인했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요? 모든 주지사가 다 확인한 선거 결과도 반려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가 패배한 선거 결과를 인정했다가 폭도로 돌변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게 두려웠던 걸까요? 밴스는 계속해서 말을 돌립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진행 과정이나 개표 과정에 문제가 있던 것 아니냐고 합리적인 문제 제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과거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미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네요. 문제는 해리스 정권이 양심에 따라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사상 최악의 감시 체계를 동원해 압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거야말로 수정헌법 1조에 어긋나는 일이고, 민주주의의 위협 아닐까요?”
대략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자, 월즈가 정색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토론이 뜻깊은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밴스 의원님과 생각이 다른 점도 많았지만, 또 접점을 찾을 수 있겠다,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겠다고 느낀 지점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이건 도저히 못 참겠네요.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요? 1월 6일 의사당 폭동 때 폭도들이 경찰과 보안관 등 100여 명을 폭행했습니다. 그게 민주주의를 향한 위협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아예 이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네요. 밴스 의원님,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졌습니까?”
“월즈 주지사님, 저는 미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후략)”
밴스가 했던 말을 또 되풀이하자, 월즈는 아마도 토론 중에 처음으로 대놓고 말을 자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That is a damning non-answer.”
“와, 진짜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네요” 또는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답이 어디 있습니까!” 정도가 될 겁니다. 혹은 비속어를 적절히 쓰면 더 적확한 번역이 될 듯한데, 굳이 이 글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밴스는 토론 내내 트럼프가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했던 말들을 조리 있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그 점이 주효했는지, 토론 전에는 밴스를 향한 유권자들의 비호감도가 높았는데, 토론 직후 나온 조사를 보면 (단순한 인상평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비호감도가 꽤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이 다 고려된 토론보다는 하이라이트로 소비할 만한 인상적인 장면이 더 많이 소비되고 회자할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밴스는 결국 목적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올해의 궤변으로 꼽기에 손색없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돌이켜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밴스가 2020년 선거 결과 트럼프가 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입 밖에 낼 수 없게 만든 트럼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걸 알면서 정치적 견해를 180도 선회해 ‘트비어천가’를 부른 밴스도 똑같이 책임이 있지만요.) 트럼프는 ‘배신자’ 마이크 펜스를 대신할 러닝메이트를 고를 때 자신을 향한 충성을 진실이나 사실보다 앞세울 것을 가장 먼저 요구했습니다. 그 테스트를 1등으로 통과한 사람이 밴스라는 걸 고려하면, 지난 부통령 토론의 하이라이트는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던 장면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밴스가 부통령이 되면 트럼프에게 충성하고 국가와 헌법을 배신하느냐, 아니면 트럼프를 등지고 헌법을 지키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 어떤 선택을 내릴까요? 바로 나온 집계에 따르면 이번 부통령 토론은 약 4천만 명이 지켜봤다고 합니다. (지난달 대통령 토론 시청자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숫자.) 미국 유권자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달 뒤면 선거가 예정대로 치러지고 결과가 나올 겁니다. 밴스가 뚝심 있게 자기가 한 말을 지킬지, 아니면 또 한 번 태도를 바꿀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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