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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이다(1/2)

(Melanie Challenger, A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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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장례식 한 시간 전, 관 속에 누워계신 할머니를 직접 보았을 때 나는 죽음과 잠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깨닫고 놀랐습니다. 잠을 자는 이들은 조금씩 계속 움직입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마치 화면이 멈춘 것처럼 정지해 있으며, 그래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작아 보입니다. 죽은 이들을 보면서 영혼의 존재를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물론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로 돌아가셨습니다. 즉, 살아계실 때도 할머니는 자신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점점 기억을 잃는 것을 보며, 그녀가 그저 예전의 자신을 잃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성 자체를 잃는 것인지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런 삶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에게 불안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과정이 우리를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만들며 한 사람의 모든 경험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체를 부정하려 하고, 현실의 어두운 굴레를 거부합니다. 문제는, 자신을 몸과는 분리된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런 생각이 실제로는 현실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고상한 인간적 정신이 동물의 몸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몸과 감각을 존재의 부차적 요인으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롯한 모든 것은 매우 굳은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신체적 경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아는 한 초기 수렵채집 사회는 모든 대상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비물리적인 특별한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철학자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모든 생명체는 영혼을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영혼에 등급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그 등급 중 가장 위에 있었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들은 이러한 생명과 영혼의 밀접한 관계 대신, 오직 인간만이 불멸의 영혼을 소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고유의 영혼을 가지며, 따라서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목적은 구원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커다란 존재의 사슬이 되었고, 오직 신과 천사만이 인간 위에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중세의 막바지에는 예외주의(exceptionalism)라는 새로운 이성적인 사상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르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기원을 둔 생각입니다. 데카르트는 정신은 신체의 기계적 특성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인간은 생각하는 정신과 생각이 없는 신체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성의 눈을 통해 만들어진 종교적 설명입니다.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구분은 이제 영혼 대신 – 혹은 영혼 뿐 아니라 –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의 이성, 도덕성, 추상화 능력이 바로 인간을 다른 자연 세계와 구분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는 당연하게도 다른 동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습니다.

존 로크, 이마뉴엘 칸트와 같은 17세기,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은 이 생각을 더 확장시켰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지성이라 주장했습니다. 지적 능력을 통해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더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이 영혼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곧 그 인간의 생각이며, 이런 놀라운 정신적 측면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유하는 생물학적 한계와 구별되는, 더 중요한 특성이라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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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등장한 다윈주의는 바로 이런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위협했습니다. 찰스 다윈의 주장은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완벽하게 구별된다는 생각과 정신은 신체와 구별된다는 이원주의 모두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습니다. 만약 인간이 영장류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면, 우리가 가진 정신 또한 자연적으로 진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윈주의가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인 생각이었을지를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쉽게 가늠하기 힘듭니다. 다윈 자신도 친구였던 미국의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에게 인간이 이 무정하고 ‘너무나 비참한’ 자연계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신이 느낀 공포를 드러냈습니다. 어쩌면 “종의 기원”(1859) 출간 후 인간 종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 열과 성의를 다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 덕분에 다른 생명체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 또한 예외주의에 포함됩니다. 인간만이 가진 특징의 과학적 증거들을 찾고, 이 특징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주장했던 20세기의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도 여기에 속합니다. 근대적 인본주의는 ‘우주를 탐사하고 새로운 행성에 거주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며, ‘인간 개성의 완벽한 구현’을 약속했습니다. 인간과 다른 동물에 대한 철학의 역사는 그저 정신적 편견의 역사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난 세기 발달한 유전자 증거와 과학적 근거들에 의해 다소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지구의 다른 모든 생명체와 연결된 그저 한 종의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지적 능력 또한 동물적 본능과 쉽게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생각과 행동에 우리의 몸이 얼마나 많이 관여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는 바뀌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며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 육체에 종속되고 죽음에 구속된 그런 존재가 아닌 어떤 특별한 초월적 존재가 우리 안에 있을 가능성을 여전히 찾으려 노력합니다. 철학자 데릭 파핏의 말을 빌면, ‘목 아래 부분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인간의 행동은 우리의 동물적 본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부정하며, 자신이 이성의 현현인 듯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의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는 때로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곧 우리 자신이라 생각할 때입니다.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만듭니다. 곧,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바로 도덕적 경계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은 인간이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구분할 때, 그 생명체가 바로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충동이나 반사와 같은 육체적 행동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도덕성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게다가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인간의 육체적, 동물적 특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신체가 없이도 살 수 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진전한 인간성을 발견하기 위한 생물학적 강화를 오늘날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생명공학 회사들은 인공지능을 넘어 뇌-기계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초지능을 개발하거나 또는 우리의 정신을 다운로드받아 정신적 불멸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우리의 신체, 육체, 감정 –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아이를 안을 때 느끼는 – 이 불필요한 것이라 여기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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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부정주의는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정신에 강력하게, 문화적 차이와 무관하게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미국의 동물학자 리차드 알렉산더는 1970년대에 이제 진화생물학의 정설이 된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인간의 주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마음이 사회적 인지를 위한 적응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무리를 지어 살게된 영장류는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고, 동시에 사회저 환경이 매우 경쟁적이었기에 ‘나’의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동기와 타인의 동기에 대한 인식과 이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기억해야 했기에 우리는 내부 상태와 외부 자극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의식을 연구하는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부분입니다. 바로 이런 다양한 주의들이 모여 우리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또렷한 인식은 우리가 신체를 통해 느끼는 감각이나 우리의 존재를 만드는 세포들 대신 일종의 부유하는 마음이나 생각, 혹은 생각에 관한 생각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곧, 우리 자신을 육체의 덫에 갇힌 어떤 존재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적 측면 때문에 느끼는 위협에 대해 더 큰 경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지요. W. B. 예이츠는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동물에 결박되어 있다.” 한편 우리 인간은 자신이 자신이 속한 신체보다 더 큰 존재라 느끼기 때문에 이 두려운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곧, 육체와 구별되는 정신적인 특성이 구원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아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감각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의 내적 상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통해 우리는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협력하고 결과를 공유하려는 생물학적 본능 없이는 불가능한, 의사소통 시스템과 보건 의료 체계, 바이러스 공동연구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타인의 마음과 경험, 의도에 대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내의 다른 이들과 가까이 있을 때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을 말해주는 “사회적 완충효과(social buffering)” 또한 인간의 협력이 진화에 의해 적응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친밀감과 건강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행복에도 기여할 뿐 아니라 면역 체계를 억제하는 코르티졸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방출을 조절합니다. 힘든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껴안고 손을 잡는 것과 스트레스를 받을 때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모두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며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이 효과는 일생동안 누적되며, 집단으로 살아가는 동물들, 특히 포유류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하지만 인간과 같은 동물에게 이 효과는 더 복잡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를 통한 사회적 완충효과를 단순히 가까이 있는 이들로부터만 받지 않습니다. 다른 사회적 동물들이 친척이나 같은 집단의 개체가 가까이 있을 때만 이런 효과를 얻는 받면, 인간은 심리적으로 가까움을 느낄때도 그 효과를 누립니다. 곧,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가깝다는 생각 만으로도 신체에 이롭다는 뜻입니다. 이 효과는 집단에 속하는 느낌을 만들어주는 어떤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에서도 성립하며, 동네 축구팀과 같은 순수한 집단 안에서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이 효과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회적 완충효과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지적 능력이나 실력이 다른 집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카스트 드 드로는 자신의 집단이 정신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믿음이 동료에 대한 친근감과 충성심을 만드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조절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이탈리아의 심리학자 제로엔 배스는 공포와 위험이 집단 내의 관계를 튼튼하게 만들며, 동료들을 더 인간적으로 (여기서 더 인간적이라는 말은 더 지적이며 공감이나 자부심과 같은 감정 또한 더 크게 느낀다는 뜻입니다) 보게 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는 자신이 속한 그룹이 정신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것을 원하며, 특히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때 이러한 느낌을 더 강하게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적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집단”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수 있지만, 인간이라는 집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최근의 연구들은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 가장 뛰어난 존재라는 생각에 대해 사람들이 아주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일리노이 노스웨스턴 대학의 누어 켈리는 집단을 이루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생물학적 위계의 최상위에 올랐다는 생각을 연구하기 위해 ‘인간 상승 측도(ascent of man measure)’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위협을 받았을 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사실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흥미로운 역설을 만들어냅니다. 곧, 인간이 동물이라는 생각 자체가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면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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