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주의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성과 감정이 충돌하며, 도덕률에 내재된 복잡성은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평등주의에 대한 월드론, 앤더슨, 뭉크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의 글을 보며 나는 열 한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이혼한 상태였고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습니다. 나는 3년 동안 세 곳의 중학교를 다녔는데, 한 곳은 별로였고, 한 곳은 그저그랬으며, 다른 한 곳은 좋았습니다. 별로인 곳은 1층을 내주고 우리는 지하에 살던 어머니 집 근처였습니다. 좋은 학교는 부유한 동네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 동네 상업 지구에 작은 아파트를 가진 가족의 지인을 이용해 그 학교로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런 위장전입은, 특히 부촌과 빈민가가 인접해 있을때 흔한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나는 저녁 늦게까지 그 동네에서 머물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에 문제가 생기자, 어머니는 한 택시 운전사와 협의해 매달 일정한 금액을 주고 나를 학교에서 근처의 아버지 집으로 데려다주도록 했습니다. 매릴랜드 교외에서 오후 2시 반은 손님이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는 동의했습니다.
운전사였던 피터는 축구장 옆의 한 나무 아래 외진 장소에서 나를 항상 태웠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서부 출신으로 액센트가 심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고향, 여자친구, 그리고 그가 다정하게 관심을 보인, 내가 읽던 책 – 주로 스티븐 킹 – 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나중에는 두 명의 친구가 내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장소까지 같이 와서 나와 피터가 떠날때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느날, 피터는 흥분한 상태로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잠깐 어딜 들러야 돼. 괜찮지?” 그는 말했습니다. “엄마에게는 말하지 마.” 그는 내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지도 않았고, 평소 처럼 우회전을 하는 대신 좌회전을 한 후 근처의 지저분한 연립주택 동네로 갔습니다. 가는 동안 그는 택시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 택시는 그의 것이 아니라 택시 회사의 것이며, 임대가 끝난 다음 그에게 택시를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매달 임대료를 내지 못하면, 회사에 택시를 반납해야 했습니다. 그 임대료는 매우 높았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운전만 해. 하지만 임대료를 채울 수 없어. 채울 수 없다고!” 그는 사촌의 집 앞에 차를 댄 후 울었습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그가 빌린 돈과 함께 흐느끼며 차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온실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 해에만도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전기요금을 내지 못했고 우리는 어두운 집에서 몸을 씻고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슬픔을 숨겼지만, 피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막막한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10여년 뒤, 마치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우연처럼 피터는 공항에서 아버지를 태웠고, 그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차로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아버지의 가족을 만나러 갔을때 나는 피터를 다시 볼 수 있었고, 무척 기뻤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보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발에 생긴 염증을 너무 오래 그냥 두었던 것입니다. 그 염증은 패혈증으로 발전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불평등은 그저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터와 나는 같은 지구위에 살았던 두 명의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뭐 그리 복잡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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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차이는 “실용적 평등: 양극화 시대의 정의(Practical Equality: Forging Justice in a Divided Nation)”에서 직관과 논리 곧, 분노와 그 분노에 대한 최선의 대응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아메리칸 대학의 법학 교수인 차이는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다”는 직관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만, 또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평등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평등을 직접 정의하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혼란스러울 수 있으며, 따라서 때로는 이를 우회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에 대한 저항과 평등의 추구를 덜 복잡한 다른 방법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헌법소송 전문가인 차이는 평등에 대한 논쟁이 법정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평등에 대한 도덕적 접근이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곧, 평등을 요구하는 쪽은 정의의 편이며, 상대편은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엘리트주의자, 압제자 등으로 비난받는 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1985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이루어진 텍사스 클레번 v. 클레번 리빙 센터 판례를 이야기합니다. 당시 한 사기업은 열 세명의 지적장애인을 위한 보호소를 클레번 시에 열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심신 미약자”를 위한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클레번 시의 조례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클레번 시는 이 보호소가 여러가지 문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네의 “분위기”를 해칠 수 있으며, 근처에 사는 노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으며, 근처 중학교에서 그들을 왕따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호소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 조례가 미국의 우생학적 과거와 연결된다고 지적했습니다. (1927년 연방 대법원은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지적 장애자의 강제불임 수술을 허용한 바 있습니다.)
클레번 사건이 대법원에 상고되었을때 보호소를 지지하는 측의 논거는 대부분 평등의 개념에 바탕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조례를 인종차별법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 법이 특정한 종교나 인종을 위한 병원의 건설을 금지하는 법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클레번 시의 편에서 장애인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그들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차별적이고 경멸적인 목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대법원에서는 평등이란 무엇인가라는 쉽지 않은 문제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평등주의를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지적장애인을 위한 장소를 두고 도덕적 성격을 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호한 질문이 던져진 것입니다. 대법원의 판결은 수많은 장애인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는 보호소에 반대한 이들을 편협한 위선자들로 몰아붙였던 주장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칫, 더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편을 들게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그 판결에 모두가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차이는 대법원이 결국 이 문제를 평등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그들은 “이성의 원칙”을 이용해 클레번 시민들의 우려가 합리적 근거를 가지는지를 따졌고, 그렇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런 접근법을 통해 대법원은 보호소에 반대한 이들이 위선자인지 따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지적장애인을 평등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월드론식의 직접적인 질문을 피해갔습니다. 물론 대법원의 결정은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의 손을 든 것이며,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위해 차별적 행동을 하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연방대법원은 다른 평등과 관련된 소송에서도 같은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1996년 미국 v. 버지니아 판결은 한 여고생이 버지니아 군사학교(남부의 웨스트포인트로 불리는)의 여학생 입학 금지 정책이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며 학교를 고소한 사건에 대한 판결입니다. 그녀를 지지한 측은 평등주의의 원칙에 기대려 했으나 곧 군사학교가 남자와 여자 생도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까다로운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대신, 여성의 입학을 거부할 수 있는 이성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차이는 이런 판결들을 통해 평등주의 논쟁을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는 “다른 수단을 통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적절성(reasonableness)이나 합리성(rationality)을 통해 불공평한 시스템이나 규칙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특정한 경우에 상식적이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지, 혹은 모든 관련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는지 등을 통해 그 방식이 공정한가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 또한 늘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평등”의 의미에 모두가 합의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확실히 쉬울 것입니다. 차이는 우리가 “도덕적 분노로부터 벗어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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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자체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불평등이란 단어는 곧바로 우리를 질겁시킨 뒤 반대편을 응원하게 만듭니다. 차이는 이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비록 수사적 명료함을 다소 잃더라도 우리의 도덕적 상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슈미츠는 2006년 자신의 저서 “정의의 요소(Elements of Justice)”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슈미츠는 먼저 살기 좋은 동네란 어떤 것인지를 묻습니다. 곧, 식료품 가게, 소방서, 도서관, 놀이터가 있는 활기찬 동네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회 정의 또한 몇 가지 다른 요소들의 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정의를 한 가지 단일한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은 여러 다양한 개념의 합이라는 것입니다.
슈미츠는 정의라는 동네에 있는 네 가지 중요한 건물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평등, 정당한 보상, 상호성, 그리고 필요입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각각 상황에 맞게 사용합니다. 시민들은 모두 법앞에 평등합니다. 반면, 근로자는 자신의 업무에 따라 각각 다른 보상을 받습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호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아이들을 대할때는 다른 요소들보다 그들의 필요를 더 우선합니다. (마이클과 안젤라는 어쩌면 다른 요소들 보다 아이들의 필요에 주목해야할 것 같습니다. 곧, “아이들이 어떤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까?” 혹은 “아이들이 전에 나한테 어떻게 했더라?”라고 묻는 대신 “아이들이 뭘 필요로 하지?”라고 묻는겁니다.) 이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그것만으로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사실 이 요소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적절하게 사용될때도 있습니다. 누구도 능력주의에 기초한 결혼은 원하지 않을겁니다. 직장에서 상호성을 앞세운다면 그 회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겁니다.
즉, 현실에서 우리는 이 정의의 동네를 계속 오갑니다. 스포츠 팀의 감독은 평등주의 원칙만으로는 팀을 운영할 수 없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더 잘하는 선수를 더 많이 내보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자비한 능력주의만을 택할 수도 없습니다. 훌륭한 팀은 선수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받고, 서로를 도우며, 각각의 성적에 따라 다른 보상을 받으면서도, 또 하나의 팀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충분히 비슷한 처우를 받는 팀입니다.
평등주의가 가진 복잡성과 난해함은 사실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진 복잡성에 기인합니다. 얼핏 이 개념은 누구나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 보이고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수많은 다른 개념들을 모두 인정하는 – 일종의 도덕적 평등주의라 할 수 있겠군요 – 능력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평등은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있는 그런 선한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뉴요커, Joshua Roth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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