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할로윈이 돌아왔습니다. 할로윈을 챙기지 않겠다는 사람들, 또 자녀를 할로윈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할로윈에 대한 비난과 분노를 일으키는 주범은 무시무시한 장식이나 공포스런 의상이 아니라, 바로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입니다. 대학 당국은 학생들에게 인디언 추장이나 멕시코 악당으로 분장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블랙 팬서나 모아나 의상을 입혔다가 문화적 전유나 인종주의 혐의를 받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전유”는 이제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고, 해를 거듭하며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유타주의 한 여고생은 졸업파티에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갔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죠. 백인 학생이 큰 링 귀고리를 하거나 드레드락 헤어스타일을 하는 것이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학생 식당이 스시를 내놓거나(오벌린대학교), 요가 클래스를 제공하거나(오타와대학교), “멕시코 음식의 밤” 행사를 열었다(클렘슨대학교)는 이유로 항의 시위가 열리기도 합니다. 문화적 전유의 형태에 이처럼 제한이 없는 이유는 그 의미에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포덤대학교 법학대학의 수잔 스카피디 교수는 문화적 전유를 “타문화의 춤, 의상, 음악, 언어, 민속문화, 음식, 전통의학, 종교적 상징을 허가 없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넓게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할로윈은 문화적 전유의 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학 당국들이 미국 원주민, 게이샤, 사무라이 등 다양한 의상들을 금지하게 된 것이고요. 시라큐즈대학은 몇 해 전 학내 경찰이 “모욕적인” 의상을 벗도록 지시할 수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책에 대한 찬반 토론이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교수들이 무지한 인종주의자라는 낙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물론 의견은 다르지만 의도가 좋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CNN 정치 평론가 크린스틴 파워스는 할로윈 의상을 빌미로 인종주의자로 낙인찍힐까 걱정하는 백인들의 우려에 대해 “다른 인종이나 문화로 분장할 수 없어서 화가 난 백인들에게: 당신들의 기분은 중요치 않아요.”라는 트윗을 남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를 전유당해 불쾌하다고 느끼거나 조롱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기분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죠. “에브리데이 페미니즘” 칼럼도 몇 해 전, 할로윈 의상에 내재된 인종주의나 문화적 전유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종주의적 경험이라는 불운을 겪을 일이 없었던 매우 특혜받은 사람들”이라고 적은 바 있습니다. “문화적 전유”라는 개념에 반기를 들면 곧 무지한 사람, 또는 자신을 부정하는 인종주의자라는 주장 앞에서 대화를 이어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서로 동의할 수 없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겁니다. 흑인이 아닌 사람이 얼굴을 검게 칠하는 “블랙 페이스”처럼 대부분 사람이 비난하는, 명확하게 인종주의적인 의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적 전유 운동의 문제점은 타 문화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규범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뉴욕타임스 역시 자녀의 블랙 팬서 의상을 허락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생생하게 묘사한 칼럼을 실은 바 있습니다. 해당 칼럼에는 자녀들에게 할로윈 의상이 갖는 인종적인 의미에 대해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포함되었습니다. 텍사스여자대학의 브리짓 비트럽 교수는 “그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곧 현상을 유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모아나나 엘사로 분장하겠다는 딸과 겪은 일화를 소개한 칼럼도 있었습니다. 필자는 “두 의상 모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고 적었죠. 문화적 전유의 문제는 물론 “백인성”이 가지는 “권력”과 “특혜”, 그리고 백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의 기준에 문제의식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필자는 딸에게 “아무도 조롱하지 않고, 다른 문화를 차용하지도 않는” 미키마우스 의상을 권했다고 합니다.
아이러닉하게도 문화적 전유의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할로윈이라는 날은 문화적 전유 그 자체입니다. 할로윈은 고대 켈트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날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분장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축제로 발전해 왔습니다.
크리스틴 파워스의 확고한 트윗과 달리, 일반적인 이미지가 특정 집단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된다는 주장에는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표현의 자유를 누가 제한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주인공 모아나를 연기한 배우 아울리 크라발리오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아나 분장을 하고, “그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 영웅으로 분장하고 싶은 어린이들”이 모아나 분장을 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해당 애니메이션에 금전적 이해관계가 걸린 하와이 출신의 10대 소녀가 허락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요?
특정 문화의 음식이나 이미지들은 사회 속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다원주의 사회인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요리나 의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문화를 “도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양성과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모자이크입니다. 영화 “시에라 네바다의 보물”에 나오는 강도 의상을 입는다고 멕시코 문화를 도용한 것이 아닙니다. 알폰소 베도야의 캐릭터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죠.
문화적 전유의 개념에 동기나 메시지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짚고 넘어갈 부분입니다. 어떤 상징이 한 집단의 순수성이나 용맹과 같은 긍정적 가치들을 칭송하는 것인지는 상관이 없죠. 물론 많은 할로윈 의상이 특정 문화의 이미지들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공주 분장은 판타지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카우보이나 군인, 사무라이로 분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특정 문화적 이미지의 용맹함이나 우아함처럼 긍정적인 부분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와 할로윈 의상을 연결 지으면서 어른들의 불안함을 아이들에게 쏟아낼 필요가 정말 있는 걸까요?
대안은 우리가 모아나와 같은 문화적 아이콘을 공유하고 더 폭넓은 문화적 전통과 대화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인디언 의상을 입은 어린 소녀는 그저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포카혼타스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폭력부터 인종주의에 이르는 어른들의 문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할로윈 의상을 차려입고 신나게 사탕과 초콜릿을 찾아다니는 어린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그런 즐거움을 서서히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어쩌면 사무라이나 공주로 분장하고 문 앞에 찾아올 어린이들에게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The Hill, Jonathan Tu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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