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과 지능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습니다. 시작은 몇 주 전 하버드의 유전학자 데이비드 라이히가 뉴욕타임스에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시실을 밝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은 지난 해 샘 해리스가 “더 벨 커브”의 공저자인 찰스 머레이를 팟캐스트 웨이킹 업에서 인터뷰한 내용에 대해 사람들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트위터에서 샘 해리스와 복스(Vox)의 에즈라 클라인 사이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클라인은 복스를 통해 라이히와 해리스에 대한 반박문을 올렸고 해리스 또한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에 대응했으며 앤드류 설리반이 클라인에 대한 공격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클라인과 해리스는 새로운 팟캐스트에서 두 시간 동안 별 소득 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한 논쟁을 십 년 이상 지켜보았고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금기를 부수는 것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인종 간의 차이에 대한 과학적 사실과 지능에 유전자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를 보게 됩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당장 이를 두고 글을 쓰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주장의 모든 부분에 대한 다른 이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지능이라는 개념의 유효성, 지능이 유전된다는 주장의 의미,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구분된다는 생각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항해 과학을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인종주의자로 생각할 뿐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왜 이런 논쟁에 참전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1년 전에 내가 바로 그랬기 때문입니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왓슨의 흑인과 백인의 지능 차이에 대한 발언을 보고 이에 관한 논문을 찾아본 뒤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큰 실수 였죠. 같은 실수를 저질렀던 사람으로써, 나는 지금 설리번이나 해리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써 몇 가지 충고를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 또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주제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내가 그런 것처럼 이들을 이해하게 될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인종의 유전적 차이는 논의해도 됩니다. 지능의 유전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능을 인종과 연결시키는 일에는 어떤 유용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당신이 지키고 싶은 과학을 과도하게 적용하는 것이며 전체 주제를 도덕적 문제로 만들어버립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과학을 거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명료함입니다. 인종의 유전학과 지능의 유전학은 서로 다른 연구분야입니다. 뉴욕타임스의 그 글에서 라이히는 명백한 유전적 근거를 가진 전립선 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특정한 유전자 위치에 아프리카 조상의 유전자를 가진 흑인들은 그 위치에 유럽인 조상의 유전자를 가진 흑인들보다 전립선 암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서 라이히는 갑자기, 비록 인종과 민족 간에 테스트 점수 차이는 존재하지만 아직 어떤 유전적 근거도 발견되지 않은 지능이라는 문제로 주제를 돌립니다.
지능의 유전학을 연구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이미 다양한 과학적 연구결과들이 있습니다. 어떤 집단에서건 지능이 유전을 통해 사회적 이득을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유전되는지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우생학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능이 유전되며 마치 부(wealth)와 마찬가지로 선택 결혼을 통해 양극화를 만들어 사회 계층을 고착화하고 공동체에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벨 커브(Bell Curve)”는 바로 이 주제에 대한 책입니다.
문제는 지능의 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를 인종과 민족으로 확장할 때 일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러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러한 의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이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후자가 순진하고 무책임할 뿐 아니라, 편견에 둔감한 이들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들과는 논의가 가능하며, 그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지능은 부분적으로 유전적이며 인종 또한 부분적으로 유전적이므로 인종간의 지능 차이 또한 어느 정도는 유전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추론에는 적어도 두 가지 과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인종을 유전학의 논의에 가져오는 순간, 인과관계를 통한 분석이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가 인종간의 지능검사 차이에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할지, 아니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을 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어떤 역할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상황에서 인종을 이야기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백인 아이, 어떤 흑인 아이, 어떤 아시안 아이가 특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지능이 아주 조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유전자에 의한 결과이지 인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부분은 IQ 논쟁에서 서로 합의가 이루어지는 드문 지점입니다. 샘 해리스와의 인터뷰에서 머레이는 인종은 유전적 특징을 나타내기에는 불충분한 기준이라고 말했습니다. 1994년 이 책이 나온 이후, 유전적 차이를 구별하는 기술은 서서히 발전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수 천 개의 유전자가 IQ에 조금씩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인종이 가진 모호함은 그저 노이즈의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머레이가 해리스에게 한 말입니다. “인종 개념을 추가하는 것은 지능에 미치는 유전자의 영향을 더 모호하게 만들겁니다.”
“인종 과학”은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특성이라는 오래된 학문으로 여전히 혐오 이데올로기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이미 가치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유전자가 집단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종과 민족 집단 사이를 퍼져가며 인간의 다양성을 늘이고 인종의 개념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전립선 암의 경우처럼 집단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언 홈즈가 아틀란틱에 쓴 글처럼 이 차이는 인종이 아니라 조상, 혹은 특정 집단을 따라 나타날 뿐입니다.
지능의 유전적 차이를 인종 개념으로 확대할때 발생하는 두 번째 문제는 유전력(heritability)학문 자체의 문제입니다. 설리번과 해리스는 지능이 유전되는 정도가 대략 40%에서 80% 라는 연구를 언급합니다. 인종 그룹 사이에도 이러한 예측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10년 전 내가 바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연구들이 여러 집단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집단 안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이 연구들은 쌍둥이나 형제들의 지능지수가 얼마나 비슷한지를 연구했습니다. 전체 집단을 대상으로 할때 고려해야할 수많은 요소들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즉, 이 연구를 가지고 인종을 이야기하는 것은 원래 연구가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육 수준이나 수입, 가족의 형태 외에도 이웃, 재산, 차별 등 인종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슬레이트, William Sale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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