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에 봉착한 이론
일상에서 작용하는 전자기력은 이미 잘 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원자 수준에서 전하를 띤 입자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대한 이론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론의 예측 결과는 실험과 맞지 않았고 물리학자들이 계산을 더 정확히 하려하면 할수록 오차는 끝없이 커져만 갔다.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에 십년 이상을 매달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파인만, 일본의 신-이테로 도모나가, 하버드의 줄리안 슈빙거가 각각 독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도모나가와 슈빙거의 풀이는 기존 이론의 확장이었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이 방법을 곧 이해했다. 하지만 파인만은 양자전기역학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그의 새로운 계산방식에 사람들은 의문을 먼저 가졌다.
“그는 물리학 전체를 새로이 발견하려 했습니다.” 코넬에서 파인만과 같이 지낸 다이슨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발견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한 방식과 같을 때는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고 그 방법이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일때 이는 엄청난 유용함을 선사했습니다.”
놀랄만한 기법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널리 사용하게된 그의 방법은 한때 불가능할정도로 복잡하다고 여겨진 계산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는 물리적 사건을 파동 대신 입자간의 상호작용으로 표현하면서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만들었다. 오늘날 그 기법은 그의 이름을 따 파인만 다이어그램이라 불린다.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입자의 과거를 선으로, 그리고 상호작용을 교점으로 표현한다. 기호를 고도로 추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기존 방법으로 계산해서는 몇 주가 걸릴 수 있는 복잡한 사건을 이 방법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 결과는 다양한 실험에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기법은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던 물리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때로 전혀 비직관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양전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법의 또다른 함의 또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바로 어떤 계산을 위해 그 현상을 표현하는 수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 입자 상호작용의 가능한 모든 과거를 더해 확률의 합을 만든다는 것이다. 파인만 또한 이 이론이 때로 기이하게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공동연구
파인만은 “절대 법칙”, 곧 자연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만약 관찰을 통해서만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예측도 할 수 없을겁니다.”
“이 말은 과학의 불확실성을 의미합니다. 관찰하지 못한 영역에 대해 어떤 가정을 하는 순간, 우리는 불확실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말을 잇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보지못한 영역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과학은 아무런 쓸데가 없을겁니다.”
1950년, 파인만은 파사데나에 위치한 칼텍으로 옮겨가 남은 생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칼텍의 또다른 스타이자 그보다 11살 어린 영민한 물리학자 머레이 겔-만과 다양한 공동연구를 시작했으며 때로 이들의 관계는 라이벌처럼 보이기도 했다.
“딕은 머레이가 일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항상 전화를 걸었어요.” 겔-만의 부인 마가렛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머레이가 정원에 있다고 말하면 딕은 편하게 전화를 끊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머레이가 물리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딕은 조바심을 내며 바로 이곳으로 오고싶어 했어요.”
두 사람은 새로운 법칙을 만들었다. 그들은 원자핵을 결합시키고 방사성 물질의 베타 붕괴에서 고속의 전자를 방출시키는 힘인 약력을 연구했다.
실험결과와의 불일치
이는 이론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두 사람은 약력을 스핀과 같은 입자의 특성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 방법은 모든 상황에 적용가능했지만, 처음 이 이론을 내놓았을때 그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실험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실험결과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베테의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이론은 정말 간단하고 직관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니 참일 수 밖에 없어.’ 그리고 그 말은 옳은 것으로 밝혀졌지요.” 결국 문제는 실험이 잚못 수행되었던 것이다.
파인만은 문제를 수학적인 방법으로 개념화했고 물리적 세부사항에서 핵심을 포착하고 법칙을 이끌어내기위해 노력했다. 그는 수학이야말로 자연의 언어라 느꼈다.
“자연을 배우고 감상하고 싶다면 자연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합니다.” 파인만의 말이다. “자연은 자신의 정체를 한 가지 방식으로만 드러냅니다. 우리가 자연에게 이를 바꿀 것으로 요구할수는 없습니다.”
1950년대에 그는 초저온에서 점성이 전혀 없는 초유체로 행동하는 액체 헬륨을 설명하는 수학적 이론을 만들었다. 파인만의 방식으로 물리학자들은 액체 헬륨의 모든 특성을 일관성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십수년 뒤 그는 고에너지 상태의 전자의 운동에 대한 훌륭한 이론 또한 만들었다.
첼린저호 조사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파인만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일반적인 위원회에 참석하기를 피해왔다. 1960년대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교과과정 위원회에 잠깐 참여해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평가했고 그 교과서들 모두가 “형편없고”, “오류로 가득차 있으며”, “쓸모없는” 것으로 평가해 충격을 주었다. 1986년 1월 28일, 첼린저 호 폭발사건 직후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파인만이 여기에 합류했다. 조사위원들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때로 조사위원회의 회의가 하루 종일 잡혀 있을 때, 그는 자리를 비우곤 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은 그는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를 돌아다니며 기술자들에게 질문을 하고 창고의 로켓 부스터를 검사하는 등 개인적인 조사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조사활동”을 원한 조사위원장인 윌리엄 P. 로저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로저스는 자신이 무언가를 발견할때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는 파인만의 습관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파인만은 청문회 현장에서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나타나 NASA의 증인들에게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던 2월 11일, O링과 같은 재질의 조각 하나를 조사위원들이 돌려보고 있을 때 그는 얼음물 한 컵을 요청했다.
고무로된 O링은 로켓 부스터의 각 로켓 부품 사이를 밀봉해 고온의 개스가 새지 않도록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문제는 추운 날씨에 그 밀봉 능력이 충분한가였다.
파인만의 예상대로, 얼음물에 의해 차가워진 고무 소재를 집게로 집었다 놓자 이 소재는 원래 형태로 바로 돌아가지 못했다. 로저스는 이 상황을 모두 보았고 몇 분 뒤 점심 시간이 되자 우주인 닐 암스트롱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인만 때문에 골치가 아프군요.”
저온에 약점을 드러낸 O링
점심 시간 이후, 파인만은 고체로켓부스터 책임자였던 로렌스 B. 멀로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람들이 가득찬 청문회를 고요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조각을 창고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조각을 얼음물에 넣었고 잠깐 눌렀다가 떼었을 때, 원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눌러진 그대로였습니다. 이 말은 곧, 이 물질이 화씨 32도에서 적어도 몇 초 동안은 탄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파인만과 다른 이들은 만약 NASA가 같은 실험을 수행하고 그 결과에 대처했다면 첼린저 호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사위원회의 작업이 마무리될때 쯤 로저스는 파인만이 보고서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겨우 설득해 동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인만은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독립적인 신랄한 결론을 내렸다. 곧, NASA 는 “우주선의 신뢰성을 거의 환상의 수준으로 과장했었다”는 것이다.
이후 파인만은 지난 월요일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암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1941년 파인만과 결혼했던 첫 부인은 결혼 후 5년 뒤, 그가 로스 알라모스에 있던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과는 이혼으며 그는 다시 기네스 하워스와 재혼했다. 그녀와 두 아이, 칼과 미쉘, 그리고 동생 조앤 파인만이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켰다.
“나는 의심을 안고도 살 수 있다.”
파인만 시대 물리학은 과거의 어떤 과학보다도 더 일상의 경험과 유리되었으며 더 어렵고 추상적이 되었다. 파인만또한 물리학의 이러한 특성에 동시대 누구보다도 더 기여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직관과 수식의 결과가 충돌하는 문제로 고심했다. 파인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시대 물리학자들은 자연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보다 ‘어떻게’ 동작하는지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의 업적 상당부분이 이해가 어렵다는 데 그도 동의할 것이다. “나는 의심과 불확실성을 안고 살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틀릴지도 모르는 답을 가지는 것보다는 모르는 상태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에서, 어떤 목적도 없는 미지의 우주에서 길을 잃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한, 우주는 그렇게 존재합니다.” 그는 말을 덧붙였다. “이 사실은 전혀 나를 두렵게 하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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