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동성 결혼 법제화는 총리를 지낸 토니 애벗의 정치 인생에서 큰 패배의 순간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동성 결혼 법제화 반대편에 섰던 인물 중 가장 무게감 있는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는 총리 임기 중에도 관련 법안을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현 총리인 맬컴 턴불 역시 애벗의 전략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자발적이고 구속력 없는 여론조사를 실시했죠. 그 결과는 수년간 각종 여론조사가 보여주었던 결과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60% 안팎의 호주 시민들이 동성 결혼 법제화에 찬성한다는 결과였죠. 곧바로 의회에서 표결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호주에서는 동성 결혼이 법적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자유당 소속 애벗의 시드니 지역구에서는 동성 결혼 찬성 의견이 무려 75%에 달했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자유당의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인 만큼, 애벗이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이는 동성 결혼 법제화에 반대했던 여러 의원의 지역구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는 보수 측 정치인들만의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동성 결혼 법제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뚜렷하게 드러난 지역이 바로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시드니 서부였으니까요. 시드니 서부는 원래 노동당 지지세가 뚜렷한 지역입니다.
지난 10년간 호주 정치에서는 이렇게 복잡한 트렌드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동성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정치인들은 대부분 다문화주의에 반대하고 페미니즘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죠. 대다수가 토니 애벗처럼 중년의 이성애자 백인 남성입니다.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다양성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죠.
그러므로 동성 결혼 법제화 찬성파들은 이민자 커뮤니티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 법제화 반대파는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면 성중립 화장실이 늘어나 강간범들이 취약한 여성들을 노릴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담긴 홍보물을 외국어로 번역해서 돌리는 등 이민자 커뮤니티 공략에 공을 들였습니다.
이민자 커뮤니티가 다문화주의를 지지해온 진보 편에 설 것이라는 기대는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결속력이 강한 이민자 커뮤니티가 동성 결혼 법제화 반대파의 물밑 공략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선 이민자들은 주류 미디어에 덜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서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이 정치적인 권위를 획득하기 쉽습니다. 또한, 신규 이민자들은 결혼을 개인적인 선택이라기보다 가족 전체를 위한 제도로 여길 가능성이 크죠. 해당 분야를 연구한 전문가에 따르면 호주의 이민자들은 동성애를 사적인 문제이지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사랑이다”와 같은 구호가 잘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라는 것이죠.
동성 결혼 반대 논리가 가장 잘 먹히는 집단이 이민자 커뮤니티라는 점은 보수에 복잡한 과제 거리를 안겨줍니다. 지금까지 보수가 공격해온 집단이 바로 다문화 이민자 집단이니까요.
지난달 멜버른 도심 지역에서 열린 보궐 선거는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지역은 노동당과 녹색당의 경합 지역으로 자유당은 아예 후보조차 내지 않았죠. 결국 녹색당이 승리했지만, 이는 자유당 지지 유권자들의 표에 힘입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보수 자유당은 녹색당을 가장 급진적인 좌파, 용납할 수 없는 정치 세력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자유당과 녹색당은 공통적으로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사회적 지위가 상승세인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자유당 지지자들은 녹색당과 노동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전통적인 노동자 계층에 뿌리를 둔 노동당보다는 코스모폴리턴적인 녹색당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자유당과 녹색당 사이의 벽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것이죠.
자유당은 수십 년간 자유시장, 자유주의를 지지해왔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도시의 자유당 지지자들은 동성 결혼과 같은 진보적인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고, 이는 전통적 의미의 보수 정당에 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호주에서 사회적 보수주의가 가장 굳건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정당이 공격해온 이민자 커뮤니티입니다. 이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농촌 지역의 백인 유권자들로,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민족주의에 호의적이지만 자유시장이나 이민과 같은 개념에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자유당이 농촌 지역 백인 표를 받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도시에 사는 자유당 지지자들은 차선책인 녹색당으로 갈아탈 가능성이 크죠. 호주 보수 정치의 모순이 어떤 식으로건 해소되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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