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달 신시내티에서 승리 유세를 시작하면서 남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당신들보다 낫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로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우월하다고 추켜세우면서 남성들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여성에게나 우리 사회 전체에나 하나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남성 전체에게 “구제 불능” 딱지를 붙여버리는 건 우리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백인 여성 유권자의 53%는 유리 천장을 깨자는 클린턴의 호소를 뒤로하고 트럼프를 찍었습니다. 이런 여성들을 제가 직접 만나보기도 했는데요, 이분들 역시 남성 일반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는 나르시시스트예요. 제가 그런 건 딱 알아보죠. 우리 남편도 그렇거든요.” 클린턴, 트럼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트럼프에게 투표한 한 중년 백인 여성의 말입니다.
이제 미국은 다시 백인 남성이 이끄는 체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240년 역사 속에서 단 8년의 예외가 존재했을 뿐이죠. 현실이 이런데도 우리는 남성을, 때로는 자신의 배우자마저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일까요? 물론 수많은 남성이 딱히 이를 부정할 처지에 있지 않으면서도 대통령직 등에 오르는 것도 현실이긴 합니다.
제가 만난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부분 성차별이 여전히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열성 트럼프 팬이자 은퇴한 미용사인 70대 여성은 대놓고 “사람들은 여자가 대통령 되는 게 싫은 거야. 그게 사실인 건 당신도 알겠지!”라고 말했죠. 우리 둘 다 남성이 여성 지위 상승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대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에게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일 뿐이었죠. 트럼프가 자신의 명성으로 여성의 성기에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한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어떤 여성은 “남자들은 다 그런 거야! 거기에 대응하는 법을 익혀야지!”라고 말했다고 하죠. 트럼프가 여성을 자신이 느끼는 매력도로만 판단하고, 모유 수유나 체중 증가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해도 뭐 어쩌겠습니까? 남자들이란 다 그런 존재인 것을요! 우리의 아버지도, 남편도, 남자 형제도, 아들도 모두 똑같은 걸요!
트럼프도 말했습니다. 자신이 여성을 사랑하고 아낀다고요. 하지만 이는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남자들은 그렇게 한심한 종족이고 우리 고상한 여자들이 그 꼴을 봐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낮은 기대치라는 또 하나의 편견에 우리 자신을 가두는 셈이 됩니다.
남성 권력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언제나 남성에 대한 증오로 그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여성주의 투쟁이야말로 더 안전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더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남성들도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운동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우리 중 다수에게는 사랑하는 남성이 있으니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나약하고 또한 가장 비합리적인 사적 영역은 정치적 신념과 가장 큰 충돌을 빚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남녀가 동등한 파트너로 인생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사실 얼마 안 된 일이죠. 구체적인 방법은 그때그때 부딪혀가면서 찾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1996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힐러리 클린턴이 미움받는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대통령 부부가 모두에게 보이는 자리에서 남녀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새로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당시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남편 곁을 지키는 전통적인 선택을 해 구설수에 올랐죠. 이번 대선에서도 어김없이 이 문제가 새롭게 주목을 받았지만, 남자들이 모두 몹쓸 놈들이라는 인식은 여전했고 오히려 트럼프의 여러 혐의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존재라면서 말이죠.
멜라니아 트럼프도 문제의 영상이 공개됐을 때, “어떨 때는 아들을 둘 키우는 기분이다.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말할 때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죠. 트럼프의 결혼 생활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2005년, 막 세 번째 결혼 생활에 접어든 트럼프는 “요즘은 남편에게 부인과 같은 역할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많아졌고, 남자들도 이에 부응한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돈을 주면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아이들과 산책을 가는 일 따위는 절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트럼프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2013년 퓨 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층을 이루고 있는 학사학위 미소지자들은 대졸자에 비해 “남편이 부인보다 돈을 더 잘 버는 것이 결혼 생활에 더 낫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두 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이러닉하게도 성별 간 임금 격차가 가장 많이 좁혀진 집단이 바로 이 계층입니다.
백인 여성들이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트럼프의 고루한 남녀관계론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는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려온, 그래서 잃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남성들의 옆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압도적으로 클린턴을 지지한 흑인 여성들의 경우, 백인 여성에 비해 자기 자신을 리더로 인식할 가능성, 가정에서 밥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선택에 의해서건 필요에 의해서건, 이들은 이미 “남자의 역할은 돈 잘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 허울뿐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트럼프는 또한 기혼 여성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에게 도전하는 것이 기혼 여성에게는 더 어려운 일일 테지요. 클린턴을 찍은 한 여성은 “강한 여성을 상징하는 클린턴이 남자들의 화를 돋우고, 그러면 여성들은 불편해진다. 어떤 여성들은 가정에서 평화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트럼프를 찍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남성도 여성을 동등한 인생의 동반자로 여길 수 있고, 양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아직은 백악관을 지키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오바마조차도 최근 자신이 나름대로 육아를 열심히 도왔지만, 자기중심적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무거운 짐은 대부분 아내가 져야 했다며 부족했던 점을 털어놨습니다. 이렇게 뒤늦게라도 책임을 인정할 줄 아는 남성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남성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치켜세우지 않는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죠.
내년에 결혼을 앞둔 여성으로서 저도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습니다. 오로지 성별 때문에 내가 남편보다, 또는 남편이 나보다 우월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제 배우자가 될 사람은 우리가 둘 다, 함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모든 남자가 트럼프 같거나, 트럼프가 될 잠재력을 가진 한심한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제 인생의 선택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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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전 아주 재미있게 본 칼럼인데, 이렇게 뉴스페퍼민트에서 번역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네요.
혹시 이 글 좋으셨던 분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NYtimes의 필진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쓴 칼럼도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본인이 올해에 쓴 글 중에 화제는 되지 못했지만 가장 마음에 는 글로 뽑은 글이기도 합니다.
지난 7월 말, 민주당 컨벤션을 마치며 크리스토프가 쓴 글로, 제목은 "When Women Win, Men Win, Too" "여성이 승리할 때, 남성도 승리합니다" 입니다. (http://www.nytimes.com/2016/07/31/opinion/sunday/when-women-win-men-win-too.html)
약간의 정치적 색깔이 반영되어있긴 하지만, 여성이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을 깰 때, 그것은 다시 다수의 일반적인 남성에게 혜택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을 말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