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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ON] 태초에 화학정원이 있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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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이론은 과학계 변방에 버려져 있었지만, 텍사스 출신으로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이름을 날리던 생물학자 빌 마틴은 이 이론에 주목했습니다. 진화생물학자인 마틴에게 화학적 삼투작용이 RNA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한 생각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슷한 생물들에서 동일한 특성이 발견된다면 그 특성은 그들의 공통 조상에서 기인한 것이라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모든 생명체가 이온의 밀도차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는 특성을 발견한 것이지요.”

2003년부터 러셀과 마틴은 함께 화학정원 이론의 생물학적 의미를 논문으로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최초의 생명은 대양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며 유기물을 흡수하던 개체가 아니라 바닷속 암석의 한 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들던 세입자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최초의 어느 순간, 바닷속 바위틈이 지질학적으로 만들어졌고, 그 바위틈 사이로 기체와 녹은 미네랄들이 뿜어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세한 틈 사이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의 이산화탄소가 틈에서 나오는 수소와 반응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반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과 황으로 가득 찬 미세 구조 속에서는 이런 기묘한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반응은 아세틸-CoA 같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대사 경로(metabolic pathways)를 만드는 작은 유기물을 탄생시켰을 것입니다.

이 확장된 화학정원 가설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곧, 어떻게 분자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은 밀도를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러셀은 바닷속 열수의 암석에는 온도 차이, 곧 내부는 뜨겁고 바깥은 차가운 그런 온도 차의 기울기가 존재했으리라 예측했습니다. 이런 온도 차이는 열영동(thermophoresis)이라 불리는 대류 과정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거대한 유기물들은 미세구조 속에 갇혀 설탕, 아미노산, 지질, 뉴클레오티드 같은 생명의 기본 요소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바닷속 높은 온도와 압력은 이 기본 요소들을 결합시켰고 더 거대하고 복잡한 분자로 만들었습니다.

러셀과 마틴은 이 시점, 곧 복잡한 유기물들이 충분하게 공급되기 시작한 때에 이르러서야 유전적 특징을 가진 요소들이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스스로 복제하는 능력을 갖춘 화학 물질은 곧 다른 미세구조 속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한편 바닷속 열수 틈에서 암석은 끊임없이 생겨났기에 이 화학물질들이 번식할 공간도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세포가 등장했습니다. 러셀은 이 과정이 그저 논리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탄생은 지질학적인 문제입니다. 이 관점을 택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발생했을 초기 조건을 임의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러셀의 가설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생명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는 화학정원이 오직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입니다. 이와 비슷한 바닷속 구조가 1977년 발견되었고, 곧 생명의 기원에 대한 논쟁이 잠시 일었지만, 그 장소가 격렬한 화산 활동으로 생긴 것으로 얼마 가지 않아 특징을 잃고 사라지자, 이 가설은 다시 힘을 잃었습니다. 당시 생명의 기원에 관한 가장 저명한 연구자였던 스탠리 밀러는 1992년 ‘디스커버’와의 인터뷰에서 이 ‘열수 틈 이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능성이 없습니다. 나는 왜 우리가 이 이론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2000년 어느 겨울밤, 한 지질학자 연구팀은 무선조종되는 수중탐사선 아르고 II호로 대서양 심해의 해저산맥을 탐사하고 있었습니다. 탐사선은 산호와 크릴새우 떼를 지나, 태양 빛이 도달하지 않는 영역을 넘어, 1km 가까운 깊이로 내려갔습니다. 갑자기 탐사선의 조명등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광경을 비추었습니다. 바로 바닥 면에서부터 솟아오른 거의 20층 건물 높이의 기이하게 생긴 여러 첨탑이었습니다. 첨탑 꼭대기에서는 마치 연기처럼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첨탑에는 달팽이, 게, 벌레, 조개 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태양 빛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미생물들은 지구 내부에서 나오는 원소들을 먹이로 살아아고 있었습니다. ‘잃어비린 도시(Lost City)’로 이름 붙여진 이 열수 틈은 1983년 러셀이 예측한 바로 그런 형태였습니다. 그의 화학정원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발견 이후 15년 동안, 화학정원 이론을 지지하는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다수의 연구자가 러셀과 마틴의 주장처럼 모든 생명의 조상이 무기물에서 영양을 얻는 독립영양생물(autotroph)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2015년 게놈 연구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이 연구는 가장 오래된 미생물들은 이산화탄소와 수소로부터 메탄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 결과는 고대 암석에서 발견된 유기물들이 메탄을 만들어냈다는 지질학적 발견과 일치합니다.

최초의 유기물이 뜨거운 암석에서 시작했다는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생물학자는 생명체가 지표면의 특정 온도 범위에서만 생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최초의 유기물들은 더 높은 온도에서 살았다는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즉 고온에서 생존했던 생명체들이 먼저 탄생했고, 그 뒤로 지표면 온도에 적응한 생명체들이 나타났다는 설명이 더 그럴듯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미생물에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몇몇 단백질은 그 핵심에 작은 미네랄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암석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제 최초의 생명체가 암석 틈 사이에서 에너지에 의해 발생했다는 러셀의 아이디어는 더 이상 황당한 주장으로 치부되지 않게 됐습니다.

(A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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