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까요? 그것은 여러 종교들이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삶의 원칙들이 더 이상 오늘날의 세계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온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이지 모압 족속, 에돔 족속, 미디안 족속 같은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내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이웃은 자신의 가까운 친척과 부족민만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만약 미디안 족을 자신처럼 사랑했다면 그것은 미디안 족과 동맹 관계인 모압 족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볼 때 마치 자살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민족과 분리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의 도덕만을 말하며,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는 그들을 위협하거나 개종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앙이란 곧 ‘우리편’인지를 확인하는 정체성에 다름 아니며, 이교도나 무신론자는 바로 ’다른 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물론 오늘날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구약 시대처럼 자신의 민족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새로운 신의 뜻이 드러났거나 새로운 성서의 해석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계몽의 시대(The Enlightment)를 거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덜 폭력적이고 더 관대하도록 바뀌었을 뿐입니다. 계몽의 시대 이후 도덕은 신이 내려준 원칙, 성직자들이 받은 영감, 성서에 써 있는 내용, 위정자의 가르침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법칙이 아니라 개인이 중심이 된,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으로 성립된, 과학을 밑바탕으로 한 원칙들처럼 아래에서부터 만들어지도록 바뀌었습니다. 특히 특정한 도덕적 행동에 대해 이 행동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가 깊이 고려되도록 바뀌었습니다.
신의 이름을 잘못 입에 올렸다는 이유로, 마녀 사냥과 같은 허구의 죄악으로,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안식일(Sabbath)에 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죽음을 맞지 않게 된 것은 계몽의 시대 덕입니다. 이 규칙들은 모두 성경에 있는 것이며, 아직도 2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은 이 책을 가장 훌륭한 삶의 신조로 믿고 있습니다.
정치적 결정에 있어 종교가 적절한 판단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서구가 받아들인지는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 역시, 더 극단적인 종교 분파들이 지배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선 것일 뿐입니다. 아직 미국에도 많은 수의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있으며, 우리는 이들이 제퍼슨이 세운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무시하고 실제 정치에 관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도 나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성 결혼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후기성도 교회(몰몬교)는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와 같은 권리를 주는 법안을 반대하는 켐페인에 돈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상의 시장에서 세속적 가치가 종교적 가치를 몰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뉴스에서 종교가 한 나라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너무나 잘 보고 있습니다. 이제 서구의 유대교인과 기독교인들은 계몽의 시대 이후 가지게 된 세속적 가치인 법 앞의 평등, 동등한 기회, 발언의 자유, 언론의 자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민권과 시민자유, 여성과 소수자들의 평등권, 그리고 특히 종교와 정치의 분리 및 어떤 종교든지 가질 수 있는 자유 등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들, 특히 7세기의 신정 국가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변화가 요원합니다.
여기에는 종교적 신앙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심오한 뜻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호전적인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매일 보고 있으며, 서구가 힘들게 이룩한 세속적 가치를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신앙만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역시 보고 있습니다. IS가 종교의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쌓인 문명의 유산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종교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믿을 만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헌법보다 종교를 앞세우거나, 전쟁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앞서 기도를 드린다는 정치인을 뽑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금까지 만들어낸 것들 중 가장 인간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도구인 과학과 이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Polit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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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이성이 가장 인간성을 증진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은 과연 맞는 말인가?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렇네요. 과학과 이성이 가장 인간성을 증진시킨다는 믿음이야말로 또하나의 종교 아닌가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서 봤을 때 글쓴이 스스로도 조금 시대가 뒤쳐졌을지도 모르겠네요.
Let imagine the world without religion as Lennon said.
과학을 종교로 보는것도 이해는 가지만, 일단 이 세상 모든것엔 믿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예를들면 코끼리를 믿는다든지 불, 나치 등을 믿는다든지, 그렇게 종교가 되기도 하였죠. 하지만 과학은 인간 스스로 발전해나가고 연구하고, 진보가 있음에 차이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면 종교라는 단어는 안어울린다 생각합니다. 종교는 순수 믿음이지만, 사람들이 과학에 느끼는 것이 믿음보다는 '확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이슬람은 언제 변하나?
이렇게 말도 안되는 글을 당당하게 쓸수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종교가 소멸되기 전에 아마 인류 멸망이 더 빠를것 같네요.
정말 인류가 멸망할때까지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겁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덜떨어진 사람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것'이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댓글에서나 성립할만한 생각입니다. 마이클 셔머가 언제 "종교가 없어진다"이렇게 딱 잘라 말하고자 이 글을 쓴 줄 아시는지. 이를테면 1."우리는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하는 주장은 여전히 아프리카의 기아로 반박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진보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2.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장 의미없게 들리는 이유는, 종교와 비종교 간의 간극이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세인들과 근대의 차이를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감소'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상대적으로 과학을 믿느냐의 문제가 제기되는 거죠. 그래서 밑에 분들은 미시적인 사고수준으로 "과학을 믿는다는 것 또한 일종의 믿음 아닌가?"하는 식의 믿음의 경향성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다릅니다. 이를테면 불구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고, 또한 발생할만한 개연적인 이유가 있지만, 누구나 조금식 문제가 있었던, 다시말해 신체적인 결함의 경향이 조금씩 있었던 원시-중세와는 달리, 불구자와 불구가 아닌 자의 구분이 뚜렷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불구에 대한 예방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구에 대한 치료도 빠르기 때문이에요.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의미없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과학은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의 문제이고, 또한 객관적 이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으로 진보하여 종교와의 독립성을 획득했고, 종교적 문제또한 "하느님을 '얼마나' 믿는 지"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느냐 '안'믿느냐"로, 종교인과 비종교인으로 뚜렷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종교를 얘기하는 것보다 그들(종교인)을 언급하는 게 더 편해졌죠. 개념적 논의가 아니라 이제는 특정한 사고를 하는 집단으로 그 개념이 축소된 겁니다. 따라서 어느시대건 죽음과,삶, 종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현대인들에게 있으나 마나 한 무의미한 겁니다. 사실상 종교는 소멸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도, 과학도 아닙니다. 그저 환상과 착란의 문제가 되었는데, 불구자는 예나 지금이나 있다는 주장으로 의학적 발전을 무시하는 발언만큼이나 어리석습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종교의 의미는 지배의 편의성에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자가 무언가를 요구할때 교회를 등에 업고 '신의 뜻이다'라고 이야기 할수 있었죠.(종교가 권력의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근현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권력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할이 점차 축소되어 갑니다. 종교의 근간이 되었던 미지의 영역이 줄어들고 교육수준이 상승했으며 무었보다도 대중을 고립시키고 침묵시키기 위한 더 효과적인 마약(언론, 매스미디어, 음란물등)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고전적인 인민의 아편은 상대적으로 외면받게 됩니다.
하지만 종교가 쉽게 멸절되지는 않을것입니다. 지금 내가 받는 고통을 죽고나서 보상받을것이라는 믿음은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하게 빛나는 하나의 불빛이 되는 셈이기 때문에굉장히 큰 위안이 되기 때문이죠, 또한 자기강화적 특성 때문에 한번 믿음을 가지고 나서 그것을 버리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의 종교가 확장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형태가 변하더라도 인류의 마지막까지(특히 인류의 종말이 예견되는 시점에) 존속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종교인을 집단주의 혹은 민족주의로 이끌고 있네요.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과 감정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지금의 환경과 기후의 변화만 보더라도 우리의 이성과 과학은 시대에 국한되어 있으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과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도덕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도덕과 법은 종교=성서=신=망상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