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쳐 일으켜 세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회사를 유능하고 열정 있는 자식에게 물려줬더니, 그 자식이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자신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며 시쳇말로 회사를 ‘말아먹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니 지켜보고 계실 겁니까? 아니면 전면에 나서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시겠습니까?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을 세운 뒤 40년 동안 당을 이끌다 지난 2011년 막내딸에게 당수 자리를 물려준 대표적인 극우 성향 정치인 장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셋째딸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국민전선을 물려받은 뒤 자신이 평생을 걸쳐 설파해온 신념과도 같은 반 이민자, 반 유대인, 인종차별주의 등의 기조를 내팽개치자, 딸을 맹비난하며 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마린 르펜은 아버지의 극우 노선과 다소 거리를 두며 대중적인 인기를 점점 끌어올렸습니다. 현재 여당인 좌파 사회당이 유로존 경제위기 과정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휘청이고 있는데다, 제1 야당인 우파 대중운동연합도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 국민전선은 장마리 르펜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극렬한 외국인 혐오, 반 이민주의, 반 유대인 정책을 내려놓고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인물과 정당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사회당과 대중운동연합이 양분해온 프랑스 정치 지형도에서 가장 강력한 제 3당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난해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26% 득표율을 기록하며 프랑스 정당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의원을 유럽 의회로 보냈고, 지난달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도 25%를 득표하며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제 마린 르펜은 2017년 대선에서 2위까지 주어지는 결선 투표에 오를 유력 후보로까지 점쳐지고 있습니다. 물론 극단주의 정치세력은 프랑스의 공화주의 가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의식이 있는 한 국민전선이 대통령을 배출하는 여당이 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버지 장 마리 르펜이 2002년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결선에 올랐지만, 82%:1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 차이로 패했던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죠. 그럼에도 일부 극단주의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만 지지를 받았던 아버지 장 마리 르펜에 비해 마린 르펜의 행보는 대중 정당으로서 성공적인 변신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하지만 86살이 된 노회한 정객 장마리 르펜은 이를 지켜볼 수 없었나 봅니다. 이번달 언론과 잇따라 실시한 인터뷰를 통해 장마리 르펜 국민전선 명예총재는 자신이 평생 줄기차게 해오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듭니다. 홀로코스트는 세계 2차대전의 일부분일 뿐이라며 나치의 괴뢰정권이었던 프랑스 비시 정부와 나치에 철저히 부역했던 페텡 장군을 옹호하고, 아랍계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에 이제는 (어디서 인용한 수치인지 모르겠지만) 1백만 명이나 된다는 프랑스 내 중국인들도 모두 내쫓아야 한다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마린 르펜 당수는 다시 한 번 인종차별주의 정책, 반 이민주의 정책과의 결별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버지의 발언은 당과 자기 자시을 파멸로 몰고 가는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못박았죠. 마린 르펜은 한 발 더 나아가 아버지 장마리 르펜의 선거운동을 당이 지원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고 장마리 르펜의 발언을 문제 삼아 당 차원의 징계 절차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마리 르펜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아마도 딸은 내가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제 나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죽기 전까지 지금 같은 모습의 마린 르펜이라면 나로부터 어떠한 협력과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거란 점입니다. 나를 당에서 축출하겠다고요? 그럼 국민전선은 끝이에요.” 이 말이 허풍은 아닙니다. 실제로 장마리 르펜이 오래된 국민전선의 지지자들로부터 누리고 있는 여전한 인기 탓에 그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마린 르펜의 젊은 참모들은 결국엔 장마리 르펜의 구 노선과 차별화 없이는 국민전선이 수권 정당이 되는 방법은 영원히 없을 거라며 마린 르펜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장마리 르펜은 “좌파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만한 저격수가 없다”며 지방 선거에도 계속해서 출마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린 르펜은 이를 말려왔지만, 뜻을 굽히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당의 기조가 흔들린다면 강제로라도 아버지를 패퇴시켜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장마리 르펜의 아성을 무너뜨릴 새로운 국민전선의 정치인이 누가 있을까요? 유력한 인물은 장마리 르펜의 손녀 25살 마리옹 마레샬 르펜(Marion Maréchal-Le Pen)입니다.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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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기는 부모없다 했는데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네요.
갈등도 있지만 역할분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쇼든 실제든 새누리당이나 자민당 등이 극우와 합리적 경제 개혁의 내부경쟁을 통해 계속해서 지지를 받는 것처럼요.
마리온 마샬 르펜 -> 마리옹 마레샬-르펜
spinning님 지적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표기가 원어 발음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