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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도 소설만큼 대접받아야 합니다

출판사와 저자가 한 마음으로 뭔가를 바랄 때가 있다면, 그건 아마 분명히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기 직전일 겁니다. 올해에도 영국의 유서깊은 도박업체 래드브록스는 46명의 작가들에 대해 노벨문학상 수상확률을 발표했습니다. 가장 확률이 높은 작가는 응구기 와 시옹오였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근소하게 두번째였습니다. (수상자는 다소 의외의 인물인 패트릭 모디아노였습니다.) 그러나 이 목록에서 가장 놀라운 인물은 세번째 후보인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였습니다. 나는 그녀가 이 목록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놀랐고, 특히 그녀가 이 상을 받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노벨상 위원회가 알렉세이비치가 리포터라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노벨상 위원회가 드디어 “논픽션”을 무시해온 지금까지의 잘못을 되돌리고 논픽션도 문학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것일까요?

위원회가 처음부터 논픽션을 무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1902년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테오도르 몸젠은 역사학자이자 수필가였고, 그 후 그와 같은 몇몇 경우가 있었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이 있었고 윈스턴 처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5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뛰어난 논픽션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했지만 문학의 세계에서 이들은 소설에 비해 예술적 요소나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다소 속물적으로 들리는 주장과 함께 무시되어 왔습니다. 이는 시각예술의 세계에서 사진이 받은 부당한 대접을 연상케합니다. 게이 탈레스(Gay Talese)는 파리 리뷰와 가졌던 “논픽션의 미학(the Art of Nonfiction)” 인터뷰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논픽션 작가는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천민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는 입구에서 제지당했습니다. 정말로 짜증나는 일이었지요.” 존 맥피(John McPhee)역시 같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논픽션(Nonfiction)이라는 이름이 문제에요. 이건 마치 ‘우리는 아침에 자몽 아닌 것(nongrapefruit)을 먹었죠’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죠.”

출판사와 서점 역시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논픽션들을 문학에서 제외하고 따로 분류하는 속물적인 흐름에 동참해 왔습니다. 그러나 장르나 작품의 종류를 가지고 그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특히 문학에 있어서는 가장 피해야할 일입니다. 오직 최고의 문학작품이란, 그 작품이 가진 호소력, 내용, 정신, 시대적 요구, 진실, 그리고 지혜를 통해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를 삶과 죽음에 마주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기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알렉세이비치는 소비에트-아프간 전쟁이나 체르노빌 사태라는 러시아의 국가적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현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증언을 듣는 방식을 택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사람들의 주장을 모은 것 이상입니다. 스베틀라나가 영어권 독자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90년 빌 부포드의 계간지 그란타(Granta)에 실렸던 “아연 속의 소년들(Boys in Zinc)”입니다. 이 작품은 비슷한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제목은 아프간 전쟁에서 사망한 소비에트 병사들이 아연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그 부모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제목입니다. 이 책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그 어떤 전쟁에 대한 다른 소설들이 이룬 것 못지 않게 전쟁의 다양한 면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독특하고 고유한 스타일과 열정, 정치적 이해와 비극적 통찰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표현 양식도 그 자체의 필요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그 규칙이 ‘상상의 것(fiction)이어야 한다’일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 현실을 글로 충실히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저자는 어떤 소설가, 극작가, 시인 못지 않게 상상력을 발휘해야합니다. 이번 목록에서 알렉세이비치가 이렇게 높은 순위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오래지 않아 넌픽션을 소설만큼 대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노벨상의 논픽션 차별이 끝날 때 즈음에는, 마치 그런 차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 조차 우습게 느껴질 것이라는 사실도요. 문학(literature)은 그저 글쓰기(writing)를 고상하게 부르는 이름일 뿐입니다.

(뉴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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