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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구 사태, UN의 침묵은 UN의 실패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지난 달 가자 지구 사태를 끝내야 한다고 말했을 때나, 그 이후 발언의 강도를 조금 높였을 때도 가자 지구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UN안전보장이사회가 인도주의적 정전을 촉구하는 약한 강도의 의장 성명을 발표하자, 그제서야 이스라엘은 반응을 보였죠. 그러나 곧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의장 성명이 하마스를 꼭 집어 지칭하고 있지 않은 점을 들어, 성명이 편파적이라며 항의했습니다. 성명이 하마스는 물론 이스라엘도 지칭하지 않았고, UN 사무총장이 안보리 의장 성명에 관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은 의장 성명에 대해 따로 항의하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와 NGO들이 반기문 사무총장의 여러 성명 역시 점령자와 피점령자를 구분하지 않고, 폭력 사태를 일으킨 쪽과 당하고 있는 쪽을 똑같이 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을 지낸 후, UN에서 두 번째 임기를 보내고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은 “이 미친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외치는 분노한 외교관의 얼굴과 힘 없는 UN을 이끌며 미국 국무부의 리드를 따르는 실용주의자의 얼굴을 동시에 보여왔습니다.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UN은 그 이름처럼 회원국들이 “뭉칠 때(united)”만 힘을 발휘해 왔습니다. UN은 창립 이래 여러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구로 발전해왔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만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수십 년 간 수 많은 UN 결의안을 무시해왔습니다. 물론 UN의 외교 수사 사전에 따르면 “촉구한다”는 “불만스럽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를 의미하고, “비난한다”는 “지금 하는 짓을 인정해줄 수는 없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테니 하던 일 계속 해라”를, “중단하라”는 “지금 멈추지 않으면 다음에 누군가가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지적할 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겠다”를 의미하니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이번에 발표된 안보리 성명은 고작 “중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을 따름이니, 문제의 본질에서는 한참 멀리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만큼이나 UN에서 방대한 서류 작업을 낳은 주제도 없을 겁니다. 1947년부터 1990년 사이에 나온 관련 결의안 690개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무용지물 신세가 된데는 냉전 구도도 한 몫했을 겁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코소보, 보스니아, 소말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레바논, 남수단에 이르기까지 냉전 후 대부분의 국제 분쟁에는 UN이 직접적으로 개입했지만, 팔레스타인만은 예외였습니다. 우선 미국의 역할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UN 내 팔레스타인 논의를 “중립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의 동맹국들이 만든 이스라엘 비난 결의안 40여 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미국의 행태는 UN의 역할에 대한 기대치 자체를 대폭 낮추는 결과로 이어졌는데, 이는 어떤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 평화를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미국의 평화 구축 프로세스가 대대적으로 실패한 후에야 UN은 가까스로 팔레스타인 논의에 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나마도 위치는 EU와 러시아를 포함하는 사중주단의 주니어 멤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40년 간 이스라엘은 UN의 수 많은 결의안들을 꾸준히 무시하고 점령과 계획 이주 정책을 확대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른바 “국제 사회”는 “국제”의 역할도, “사회”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향을 보장한 결의안 등 UN의 결의안들을 준수한다는 조건 하에, UN의 동의에 따라 만들어진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코피 아난 전 UN 사무총장의 말처럼,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UN의 평판은 계속해서 낮아질 것이고 편파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Al Jaze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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