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1월 3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국가애도기간입니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로 탑승객 대부분인 179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한국 사회는 참담하고 슬픈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누고 위로받고 덜어내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슬픔의 원천에 대한 사회적인 관념이나 편견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그런 사회적인 편견이 개인에게 체화돼 사람들이 슬픔을 드러내기보다는 쉬쉬하고 속으로 삭히다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또는 슬픔의 양을 재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난 탓에 슬픔의 절대적인 양과 크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애도(哀悼). 국어사전에는 그 뜻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풀이돼 있습니다. 영어로 슬픈 이를 위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 단어는 “condolences”가 있고,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로 “mourning”, “grief” 등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는 게 당연하고, 특히 가까운 사람,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추스르기 어려울 만큼 큰 슬픔에 빠지는 것도 자명한 이치 같은데, 막상 애도를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물으면, 우리는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 또한, 슬픔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는 문화 탓일 수도 있습니다. 슬픔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가 되다 보니, 슬픔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지 못한 셈이죠.
오늘은 자살로 떠난 친구를 애도하는 방법에 관해 작가 슬론 크로슬리가 쓴 칼럼을 통해 올바른 애도, 슬픔을 잘 받아들이는 법에 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개인의 죽음을 계기로 쓴 글이지만, 집단 참사를 겪은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사회적인 애도와 비교해도 애도를 더 잘하기 위해 우리가 갖추고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일지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전문 번역: 애도에 관한 회고록을 썼더니… 독자들에게서 받은 놀라운 편지들
스브스프리미엄에도 글을 쓰는 나종호 교수의 저서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에는 애도의 단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인의 경험을 사례로 들며 애도에 연구자인 데이비드 케슬러 박사를 인용해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으로 이어지는 애도의 선형적인 과정을 소개하고, “의미 찾기”라는 마지막 단계를 추가해 소개합니다.
의미를 찾는 단계에 관해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흔히 애도를 여행(journey)에 비유합니다. 보통 여행은 시작한 곳으로 돌아올 때 끝이 나죠.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고 다녀오는 여행을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그래야 여행을 마치고 나서 순조롭게 일상을 재개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사실 애도의 과정을 여행에 비유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한참 슬퍼한 뒤의 나는 그 사람을 잃기 전의 나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를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 없이 사는 삶은 크든 작든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종호 교수는 애도를 ‘귀환 없는 여정’이라고 칭했습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고 다시 그런 나로 잘 살아가는 과정까지 애도에 포함하는 겁니다.
의미를 잘 찾고 새로운 나를 마주하려면 애도의 앞 단계들을 잘 거쳐야 합니다. 특히 고통스럽고 슬픈 상황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거치지 못하면 의미를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또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정답과 오답이 없는 과정이란 뜻입니다. 의미를 찾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쓴 크로슬리는 (나종호 교수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여정(journey)이란 단어를 비틀어 이해합니다. 원래 자기 성격이 진지한 걸 잘 견디지 못하고, 그래서 애도를 엄숙한 여정으로 풀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웃음을 가미합니다. 저도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을 낸 뒤 한 인터뷰를 보면 재밌는 장면, 에피소드들이 꽤 많이 소개된 것 같습니다. 이걸 두고 누군가의 죽음을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개인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삶을, 그 안에 자신과 얽힌 추억을 돌아보고 기리는 일은 떠난 자리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일 테니까요.
크로슬리는 귀금속을 한꺼번에 도난당한 지 얼마 후에 직장 상사이자, 좋은 친구를 자살로 떠나보낸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물건의 작지 않은 금전적 액수에 속이 쓰렸지만,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고 난 뒤의 아픔과 충격은 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래 갔습니다. 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크로슬리는 떠난 친구와의 추억을 곱씹고, 친구 없는 자신의 삶을 조망합니다.
집단 참사 이후 사회적 애도에 추가돼야 하는 요소: 공감
사회를 비롯한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이 함께 겪는 집단 참사의 경우도 애도의 과정을 보면, 뼈대는 비슷합니다. 다만 개인의 애도 과정에선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참사의 희생자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저 소식을 듣고 함께 가슴 아파하는 대다수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저를 포함해 이 글을 읽는 분 대부분이죠. 그런 우리가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할 때 혹은 그 공감의 정도가 크게 어긋날 때 애도의 과정은 전반적으로 어그러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가장 한국적인 장면으로 합동분향소의 모습을 꼽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현대사는 여러 사람의 목숨이 허망하게 스러진 일들로 점철돼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합동분향소 장면을 보면 봉 감독 특유의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 “괴물” 속 합동분향소에서 유족들은 오열하는데 기자들은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자 플래시를 터뜨려가며 사진을 찍고, 주차 관리인은 울부짖는 유족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길을 막고 주차해 놓은 차주를 찾으려고 악을 씁니다. 가누기 어려운 슬픔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눈앞에 있는데 이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모습은 헛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를 날카롭게 빗댄 장면이었습니다.
2025년 한국 사회는 영화 “괴물” 속의 모습보다 나아졌을까요? 합동분향소의 모습만 보면 그래도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인지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으로 보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쩔 수 없이 공감은 점점 옅어지고, 슬픔의 괴리는 커질 겁니다.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말을 무심결에 흘리는 사람도 자꾸 나올 겁니다.
이런 말들은 의도와 무관하게 유족에게 상처를 주고, 애도의 과정을 방해합니다. 애도의 과정을 온전히 거치지 못하면, 트라우마는 커집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그 사람 없이 살아가는 새로운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계속해서 사고 자체를 못 받아들이고, 억울하고 원통한 상태가 이어집니다. 말 그대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힘겨운 나날일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더라도 희생자 유족들에게 무심결에 상처를 주고 애도를 방해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도록 모두가 신경 써야 합니다.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요? 기한은 없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애도의 과정과 속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니까요.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 사회가 2014년 세월호, 2022년 이태원 참사 이후 저지른 실수 혹은 큰 잘못이 바로 기다리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끝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허망한 죽음들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겁니다.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걸 우리 스스로 입증하려면 유가족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영원히 함께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된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이니, 영원히 슬픔 속에 있더라도 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 이에게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자 동료 시민으로서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그 사람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끔찍한 사고로 인한 집단적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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