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패션과 철학

패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3가지 요소를 말하는 의식주 중 첫 번째를 차지합니다. 누군가 멋진 옷을 입고 달라 보일 때 우리는 옷이 날개라고 말하지요. 선녀의 날개옷 만큼은 아니라도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그를 다르게 대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개념을 당위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말장난에 그칠 때도 있지만 의외로 심오한 의미를 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리()란 있어야 할 것을 있어야 할 곳에 두는 것이라는 식이죠. 좋은 글은 쓰여야 할 것이 쓰인 글입니다. 이 방식을 따르면 패션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릴 것은 가리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사진=Unsplash

유행하는 패션에 ‘~룩’ 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최근 상수룩과 독기룩을 소개하는 칼럼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상수룩은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에서 나온 말로 편한 바지에 편한 셔츠를 넣어 입는 것입니다. 독기룩의 어원은 좀 더 재미있습니다. 지금 이 글에서 이 말을 처음 들은 분은 한 번 찾아보시죠. 상수룩이 가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독기룩은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 패션이라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좋은 패션은 TPO, 곧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는 패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상황이라는 말에 시간과 장소가 다 포함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옷을 입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철학으로 자신만의 패션을 만든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패션이 재미있는 것이죠. 바로, 늘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항상 검은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은 스티브 잡스와 회색 티셔츠만 입는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적어도 패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옷만으로도 그 사람을 연상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거야말로 궁극의 패션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스티브 잡스의 검은 터틀넥을 만든 이세이 미야케가 지난 8월 5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 언론이 그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이세이 미야케를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플리츠(pleats, 주름) 디자인입니다. 편리함과 패션을 동시에 추구했고 구겨지거나 찌그러지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 백화점의 이세이 미야케 매장을 방문했을 때 주름 디자인의 셔츠와 바지를 보았습니다. 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눈에 띌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의 바오바오백 역시 국민 가방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합니다. 플라스틱 직각 삼각형 네 조각으로 정사각형을 만들고 그 정사각형이 이어진 가방은 내용물이 없을 때는 얇고, 내용물의 형태에 따라 가방의 모양이 자유롭게 바뀝니다. 10여 년 전, 어떤 모임에서 그 가방을 들고 온 남자분에게 그 가방의 브랜드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세이 미야케 매장을 방문한 것은 스티브 잡스의 터틀넥을 구매해볼까 하는 마음에서였지요. 정확히는 잡스가 입던 것은 터틀넥이 아니라 목넥(Mock Neck)이라는 것으로, 터틀넥이 목 부분에서 한 번 접히는 것과 달리 목 위로 조금 짧게 올라오는 디자인입니다.

잡스가 입던 터틀넥은 잡스가 사망한 뒤 더는 판매되지 않습니다. 2017년, 이세이 미야케는 디자인을 더 다듬어 세미-덜 T(Semi-Dull T)라는 이름으로 내놓았습니다. 제가 매장을 방문했을 때 재고는 없었습니다. 가격은 30만 원이었지요. 면 폴리에스터 혼방 터틀넥치고는 상당한 가격입니다. 아마 재고가 있었어도 사지 못했을 것 같네요.

터틀넥의 오랜 애호가로 말씀드리자면, 면(cotton) 보다는 양모(wool)가 더 고급스럽습니다. 물론 양모 중에 가장 비싼 캐시미어로 만든 터틀넥은 더 좋지만, 캐시미어 자체가 약하기 때문에 보통 면과 혼방으로 나오거나 아니면 가격이 아주 비싸지요.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적당한 울 터틀넥을 만들고, 작년에는 H&M의 메리노 울 터틀넥(59,900원)이 가격이 좋아 여러 벌 사서 입었습니다.

verit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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