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나는 용이 귀해진 요즘의 상황은 학계뿐 아니라 어느 분야라도 문제입니다. 다양성이 줄어들고 비슷비슷한 사고를 하는 사람끼리만 모여 있다 보면, 창의력과 역동성이 떨어지고 자연히 혁신도 일어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죠. 집단이나 사회는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섞여 지낼 때 결국 더 좋은 결과를 냅니다.
경제학자들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도 성인이 돼서는 좋은 일자리를 얻고 중산층 또는 부유한 계층에 오를 기회가 풍부한 사회가 바람직한데, 그런 사회의 요건이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교육은 계층을 오르는 사다리의 대표적인 요인으로 꼽힙니다. 미국에서는 부자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부유해지고 가난의 대물림도 점점 심화하고 있지만, 그래도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40%가 채 되지 않다 보니, 여전히 (고등) 교육을 받았을 때 올릴 수 있는 미래의 기대소득을 뜻하는 ‘교육 프리미엄’은 다른 선진국보다 더 큽니다.
논문을 요약하면 부유한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이 계층 이동에 중요한 요인으로 보입니다. 똑같이 가난한 집안 출신 아이라도 부유한 집안 출신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더 잘 타고 올라갔습니다.
저자들은 ‘경제적 연결(economic connectedness)’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서로 출신 계층이 다르더라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환경이 경제적 연결이 강력한 곳인데, 여기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도 튼튼했습니다. 반대로 경제적 연결이 약한, 즉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친구가 되는 지역에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도 잘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뉴욕타임스 업샷의 분석을 위주로 이번 논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연구의 의의를 찾는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에 관해서도 마지막에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어디서나 똑같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미 같은 저소득층 출신 자녀라도 부유한 동네에서 자라면 나중에 어른이 됐을 때 소득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소득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형편까지 엇비슷한 경우에도 어느 지역 출신은 성인이 됐을 때 돈을 더 잘 벌었고, 반대로 어떤 동네 출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질문에 대한 답을 라즈 체티 교수와 공저자들이 내놓았습니다.
바로 경제적 연결(economic connectedness) 정도였습니다. 소득 수준에 따라 사회적 네트워크가 서로 단절되지 않은 곳,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섞여 사는 곳에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더 잘 작동했습니다. 특히 부유한 학생들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에서 자란 가난한 집안 학생들은 자라서 더 높은 소득을 올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는 지마리엘 보위(24) 씨의 사례가 소개됩니다. 캘리포니아주 페어필드 출신의 보위 씨는 가정 환경이 넉넉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해 어머니와 살았는데, 가계 소득이 일정하지 않아 집을 잃고 쫓겨난 적도 있죠. 그런데 보위 씨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같이 어울린 친구 중에는 부모님이 둘 다 의사나 변호사인 부유한 학생들이 꽤 많았습니다.
“엄마는 늘 제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대학 입시와 관련해선 아무런 정보가 없었죠. 저는 SAT가 뭔지도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친구들은 부모님이 때가 되니 다들 SAT 준비반을 끊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런 수업을 찾아들었죠. 대학 원서에 쓴 제 자기소개서는 아예 친한 친구 부모님이 직접 봐주셨어요.”
보위 씨는 가족에서 처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지금은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가 됐습니다. 로스쿨에 간 뒤에도 이런 직업이 있다는 걸 고등학교 친구의 친구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맺는 관계와 그 관계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통틀어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부유한 지역에서 사회 자본이 높습니다. 체티 교수와 연구진이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친구 관계 데이터 210억 건을 분석한 이번 논문을 보면, 부유한 이들과 친구가 되거나 섞여 지내기만 해도 사회 자본이 높은 곳에 사는 것과 비슷한 경제적 효과가 나타납니다.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정도가 큰 지역일수록 가난한 학생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오를 가능성이 컸고, 이는 해당 지역의 인종 구성이나 소득 수준, 학교의 수준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 자본에 관한 고전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의 저자이기도 한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남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가 미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50년간 미국 사회에서 사회 자본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연결고리가 계속 끊어지면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사회 자본이 줄었는데, 연구가 이 점을 잘 포착했다고 평가한 겁니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점점 다른 계층,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과 마주칠 기회가 적어지는 사회가 됐습니다. 계층에 따라 사는 지역이 달라지다 보니, 학교에서 사귀게 되는 같은 반 친구들은 나와 경제적인 수준이 비슷한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은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지금보다 소득 수준이 낮아질까 우려가 커지면 사람들이 더욱 끼리끼리 모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미국은 서로 다른 계층 간에 어울리는 걸 꺼리는 사회가 됐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가는 친구들을 보통 언제 사귀시나요? 개인차가 있겠지만, 미국의 경우를 보면 소득 수준에 따라 친구를 만나는 시기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고소득층은 대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확률이 저소득층보다 훨씬 높았는데, 이는 저소득층보다 대학 진학률 자체가 높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쨌든 미국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그냥 이웃에 사는 이들과 친구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도시든 시골이든 소득 계층에 따라 사는 지역이 뚜렷하게 갈린 곳이 많으므로, 옆집 사는 친구, 한 동네 사는 이웃은 대개 경제 수준이 나와 비슷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소득 수준에 따라 친구를 사귀는 정도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시기가 있는데, 바로 고등학생 때입니다. 또한, 보통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과는 오랜 시간 우정을 지속하는데, 이때부터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기도 하죠. 체티 교수와 연구진은 그래서 고등학교 때 누구를 친구로 사귀는지, 얼마나 나와 형편이나 출신 배경이 다른 이를 친구로 사귈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업샷 기사에 소개된 보위 씨가 다닌 안젤로 로드리게즈 고등학교(Angelo Rodriguez High School)가 대표적으로 서로 계층이 다른 이들이 연결되기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2001년에 개교한 이 학교의 학군은 경제 수준이 다양한 동네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위 씨도 이 학교에 배정돼 부유한 친구들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죠.
유유상종과 같은 말은 어느 문화권에나 있습니다. 영어로는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와 같은 말이 있죠. 출신과 배경이 다양한 학생들이 한 학교에 다니고, 같은 반에 배정된다고 알아서 친구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두면 학생들은 아무래도 익숙하고 편한 이들과 무리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비슷한 인종, 비슷한 경제 수준의 학생들끼리만 어울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안젤로 로드리게즈 고등학교는 경제적 연결을 위해 몇 가지 세심한 장치를 마련해뒀습니다. 우선 교정 한 가운데 도서관과 산책로가 있었는데, 이걸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고 서로 모르는 학생과 자꾸 마주치게 됩니다. 또 이틀에 한 번씩 두 시간씩 다른 반 학생들과 함께 토론이나 조별 프로젝트를 하게 돼 있습니다. (반대로 성적에 따라 이른바 우열반을 나눠 운영할 경우 경제적 연결이 약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또한, 방과후 특별활동에 특히 신경을 써서 서로 다른 학생들이 같은 목표를 위해 서로 도우며 땀 흘리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팀 스포츠나 밴드, 합창반, 만화반 등 활동도 다양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하는 스포츠도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데, 안젤로 로드리게즈의 방과후 특별활동은 모두가 함께 즐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함께 연주하고 운동하면서 보위 씨 같은 저소득층 출신 학생들은 부유한 집안 출신 학생들이 목표로 삼은 대학교 진학의 꿈을 자연스레 같이 꾸게 됩니다. 보위 씨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용이 날 수 있는 개천이 갖춰진 덕분이기도 합니다.
연구진은 고등학교 친구의 다양성을 척도로 삼아 데이터를 분석했지만, 연구의 교훈을 사회의 다양한 곳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통 학생 수가 고등학교보다 훨씬 더 많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친구를 사귀게 두면 본능적으로 유유상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적 연결은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죠. 안젤로 로드리게즈 고등학교에서 한 것처럼 우연히, 하지만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동료 학생을 마주치게 해야 합니다.
예일대학교는 기숙사 룸메이트를 학생들이 직접 고르게 하지 않고, 서로 출신 배경이 다른 학생들을 한 건물에 묶어서 배정하고 길게는 4년 내내 함께 생활하게 합니다. 반대로 전통의 사교 클럽이 대학 생활의 중심으로 남아있는 남부의 많은 대학에선 학생들이 4년 내내 자기와 비슷한 이들하고만 어울리다 졸업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도시를 계획할 때도 공원이나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공공장소를 시민들의 동선을 고려해서 만들고 배치해야 합니다. 도서관은 책뿐 아니라 라디오 스튜디오, 글쓰기 수업, 카페 등 문화생활 공간이자 공동체의 사랑방처럼 기능하는 공공재입니다. 나와 형편이나 처지가 전혀 다른 사람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건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저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모아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친구가 돼 서로의 삶과 꿈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의 결과를 해석하고 교훈을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자 노력한 각 언론사 편집부의 노력이 보입니다. 문제는 체티 교수와 공저자들이 경제적 연결 정도와 계층 이동의 사다리 사이에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밝혔을 뿐 인과관계를 밝히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셜미디어에 부자 친구가 있는 사람의 훗날 소득이 높았다는 말과 소셜미디어에서 사귀어 둔 부자 친구 덕분에 훗날 소득이 높았다는 말은 다른데, 자칫 둘을 혼동할 수 있습니다. 여러 계층 친구를 사귄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제목도 읽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여러 변인을 통제하며 실험할 수 없는 사회과학 연구에서 인과관계를 밝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구자가 아닌 독자로서 연구 결과를 접할 때 오독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역인과성(reverse causality)을 가정해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 연결과 계층 이동의 사다리 사이에 상관관계는 분명해 보이는데, 여기에 인과관계는 없는지 살펴보려면 경제적 연결이 높아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잘 작동한 건지, 아니면 반대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튼튼하게 마련돼 있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계층 출신인데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지를 따져보는 거죠. 많은 경우 두 가지가 동시에 원인이자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일방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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