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존슨 총리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뒤 7월 13일에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입니다.
2016년 6월 영국 국민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계속 남아있어야 한다는 의견보다 52%:48%로 근소하게 앞선 표 차였지만, 어쨌든 국민투표 결과는 결과였습니다. 집권 보수당은 국민투표 결과에 자신의 직을 걸었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후임으로 테리사 메이 총리를 구원투수로 투입합니다.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기로 했어도 아예 모든 관계를 끊고 남으로 지내는 건 아니니 유럽의 일원이 아닌 영국과 유럽연합의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메이 내각은 오랜 협상을 벌였습니다. 브렉시트를 애초에 원하지 않던 브렉시트 반대파 출신 메이 총리는 유럽연합 밖에서도 다방면의 협력을 이어가는 이른바 ‘소프트 브렉시트’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협상 끝에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이어지면서 메이 총리의 소프트 브렉시트는 끝내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집권 목표를 오직 ‘완전한 브렉시트’ 하나로 꼽은 보리스 존슨 총리가 그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존슨 총리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부터 브렉시트를 찬성한 인물입니다. 기존 정치의 문법과 관행을 과감히 파괴한 존슨 총리는 자신의 뜻대로, 또 집권 당시 약속한 대로 브렉시트를 기어이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지켜야 하는 온갖 규정과 규범까지 밥 먹듯이 어기고 거짓말을 일삼던 존슨 총리는 ‘상처뿐인 브렉시트 완수’만을 업적으로 남긴 채 당내 관료, 내각의 신임을 잃었고, 지난주 마침내 쓸쓸히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습니다.
존슨 총리의 임기 3년을 돌아본 주요 언론의 기사, 칼럼 중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틀란틱의 칼럼 두 편을 묶어 소개합니다. 논조는 둘 다 비슷합니다. 한 편은 거짓말로 점철된 보리스 존슨의 삶처럼 끝내 거짓말로 망한 존슨의 정치 인생을 돌아본 글이고, 다른 한 편은 존슨 총리가 강행한 브렉시트가 남길 후유증을 조망한 글입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저 말이 존슨 총리의 입에서 나오기까지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존슨 내각의 주요 장관들이 모두 총리에게 등을 돌리고 사퇴를 압박하는 게 명확해진 시점에도 존슨 총리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말의 미련이 남았는지 총리직을 고수하려고 잠깐이나마 헛되이 버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임명한 장관의 성범죄 전력을 알고 있었느냐를 두고 한 거짓말이 존슨 총리의 임기를 조기에 끝장낸 사건으로 기록됐지만, 이번 스캔들 전부터 보리스 존슨의 정치 인생은 이미 온통 거짓말로 점철돼 있습니다. 존슨 총리의 내각에 참여한 보수당 정치인들의 심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총리를 두둔했지만, 그 대가로 우리도 거짓말쟁이에다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총리는 여기에 책임을 지라!’ 정도가 될 겁니다.
정해진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내각의 신임을 잃으면 언제든 총리가 바뀔 수 있는 의원내각제에서 장관들의 줄사표를 버텨낼 수 있는 총리는 없습니다. 대통령제에서 대단히 까다로운 요건을 갖춰야 발동할 수 있는 법적인 탄핵 절차가 의원내각제에서는 정치 과정에 포함된 셈이죠.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주목받은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기존의 정치 엘리트들이 서민들을 얼마나 우롱하고 호도했는지 맹렬히 비판하면서 득세했습니다. 존슨이 총리직에 오른 과정에도 비슷한 정서가 분명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를 비롯한 극우 정치인들도 더하면 더했지 거짓말 없이 새 정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지지자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요.) 존슨 총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존슨 총리는 일대기를 거짓말로 엮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20대 때 기자로 일했던 존슨은 가상의 취재원을 만들어내 하지도 않은 말을 조작해냈다가 적발돼 해고됩니다. 40대 때는 당 지도부와 기자들에게 자신의 스캔들에 관해 거짓말을 했다가 적발돼 그림자 내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말에는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어긴 (자신의) 생일 파티는 결단코 없었다고 수없이 말했지만, 전부 다 거짓말로 드러났고, 영국 총리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과태료를 낸 총리가 됐습니다.
거짓말과 미봉책으로 연명해온 정권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왔을 가능성은 매우 작습니다. 실제로 존슨 총리는 ‘~주의’라 부를 만한 정책, 가치관을 설파한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저 브렉시트를 완수하겠다는 목표 하나만 부르짖으며 집권했고,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해 브렉시트 강경 추진파로 의회를 채운 뒤 그 목표를 향해 성큼성큼 전진한 게 지난 3년 동안 존슨 총리가 한 ‘정치’의 전부입니다. 여전히 보수당 내에 건재한 대처주의(Thatcherism)나 노동당의 새 길을 연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제3의 길 같은 영향력을 존슨의 유산으로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 설정, 정부와 시장의 권력관계를 조율하는 정치의 역할 등에 관해서는 별다른 유산이 없는 존슨 총리지만, 오히려 정치적인 논의를 의도적으로 건너뛰고 성급히 완수해버린 브렉시트가 영국과 유럽, 전 세계에 미칠 영향은 매우 클 것입니다. 당장 영국의 위상은 유럽연합의 일원일 때보다 낮아졌습니다.
물론 영국이 쇠락한 원인을 모두 존슨 총리에게서 찾아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존슨 총리는 영국의 추락하는 위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임기를 보냈습니다. 좋든 싫든 50년 가까이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지내면서 축적된 무역, 협력의 경험과 제도들은 훨씬 위태로운 약속으로 대체됐고, 새로운 약속에 속전속결로 도장을 찍어버린 탓에 다음번 영국 정부가 다시 유럽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해도 그러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됐습니다.
존슨 총리의 유일한 유산이라 할 만한 ‘서툰 브렉시트’의 상처는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후임자가 누가 되든 3년간 사실상 부재했던 정치의 공백을 메워가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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