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별로, 지역 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은 대체로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추산에 따르면 코로나19 희생자는 전 세계적으로 1,500만 명이 넘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이 코로나19 바이러스였던 사례뿐 아니라 팬데믹 때문에 의료 체계가 마비돼 만성 질환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수술을 받지 못해 숨진 사람들까지 모두 더한 숫자가 그렇습니다.
엔데믹(endemic)에 관한 논의를 통해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가 부족했던 점을 돌아보고 반성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더 철저한 준비 태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인류는 언제든 또 다른 전염병이 왔을 때 막을 수 있던 희생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팬데믹에 맞서는 방법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원래 국내 정치로 한정하면 정부의 권한이 크지 않은 미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정부가 특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화를 키웠고, 그 결과 모두가 다 아는 처참한 수준의 방역 성적표를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는데, 이런 경제 수준에 따른 피해의 차이는 미국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을 자본주의의 어쩔 수 없는 그늘로 치부한 채 방치한다면 그 사회는 영원히 언제가 올지 모를 팬데믹 같은 외부 충격에 취약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운영하는 빌 게이츠는 전 세계 곳곳에서 전염병을 예방하고 맞서 싸우는 데 막대한 돈을 대고 있습니다. 자선 사업을 향한 믿음과 철학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해온 게이츠는 자신의 평소 주장들을 정리해 “다음번 팬데믹, 어떻게 예방할까?(How to Prevent the Next Pandemic)”라는 책도 펴냈습니다. 게이츠는 다음번에 또 전염병이 퍼지려 할 때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자선 단체보다 더 많은 공공 부문의 책임 있는 노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5월 복스 리코드(recode)의 희지 킴 기자가 게이츠 이사장과 진행한 인터뷰를 게이츠의 답변 위주로 요약, 정리했습니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정부가 제때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습니다. 물론 자선 사업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해보고 때로는 의사결정 구조가 복잡한 정부보다 신속히 필요한 자원을 투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을 예방하는 일은 많은 나라와 기관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긴밀히 협력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런 대규모 협력의 키를 자선 단체가 쥐는 건 적절치 않습니다.
책에서 저는 마치 정부가 화재나 지진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조처해두는 것처럼 팬데믹을 예방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섰습니다. 먼저 위험한 바이러스를 철저히 연구해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바이러스가 창궐하더라도 빠르게 번지는 건 막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예산을 들여 할 수 있는 일은 효과적인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드는 일, 주요 전염병 감시 체계를 강화하는 일, 의료 시설들의 전염병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일 등 많습니다.
현재 전 세계 보건 정책에서 협력의 중추 역할을 하는 세계보건기구(WHO)는 회원의 자격을 각국 정부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자선 단체는 투표권이 주어지는 WHO의 회원이 될 수 없죠. WHO가 한정된 예산과 인력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각국 정부의 투표에 따라 결정되는데, 팬데믹을 겪고 나서 또 다른 팬데믹을 예방하는 데 더 신경을 쓰자는 여론이 WHO 안에서 생겨날지 주목됩니다.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정부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게이츠 재단과 같은 자선 단체는 정부나 민간 부문이 안 하거나 못 하는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기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라리아와 같은 전 지구적인 보건 문제는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 제도에 맡겨서는 풀 수 없습니다. 이윤이라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으니까요. 이번에 코로나19 백신을 개발,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과학자와 자선 단체, 전 세계 보건 단체들의 협력이 빛났죠. 이번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다음번에 잘 접목하면 좋겠습니다.
부유한 나라 정부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투자하고 질병 감시 체계를 만드는 데 주목해야 하는 반면, 아무래도 가난한 나라는 정부가 생각은 하더라도 그럴 여유가 없다고 할 수 있죠. 좋은 뜻이 있는 부유한 개인이나 자선 단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의료 부문의 혁신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우리가 다리를 놓아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료제나 백신 개발을 지원할 수도 있고요.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수많은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임에도 몇몇 주장은 꽤 호응을 얻은 것 같고, 그로 인해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 무시당했는데, 그 피해는 가짜뉴스를 믿은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돌아왔습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복잡한 진실보다 명쾌한 설명에 끌리는 건 인지상정이기도 하지만, 그 명쾌한 설명이 사실과 다를 때, 그래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을 때는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어느 나라, 어느 지역,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기대 수명이 상당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20년도 더 전에 제가 아내 멜린다와 함께 재단을 만들어 자선 사업을 시작한 이래 많은 것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난 어린이는 미국에서 태어난 어린이보다 다섯 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사망할 확률이 28배 더 높습니다.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해볼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전염병이 창궐하더라도 팬데믹이 되기 전에 지역적 수준에서 막을 수 있도록 조기 경보 체계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둘째, 차세대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위해 R&D 투자를 대폭 늘리고, 특히 저소득층과 개발도상국 국민들도 소외되지 않도록 의료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를 향해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을 제안한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지만, 그 당연한 것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코로나19 팬데믹에 큰 피해를 봤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 당연한 말들부터 새겨듣고 준비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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