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미국 극우파와 푸틴, 다시 쓰는 이념 지형

우리는 한 사회의 이념 지형을 묘사할 때 흔히 좌우, 보수/진보와 같은 넓은 개념을 사용합니다. 사회 구성원 간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쪽이 진보, 반대로 기존의 전통과 안정을 추구하는 쪽이 보수라는 큰 틀이 있다는 전제 아래서죠. 하지만 한 사회의 이념 지형과 특정 집단의 성격은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이나 대외 정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조선 말 한반도에서 보수는 쇄국을 의미했지만, 일제 강점과 전쟁을 거치면서 보수가 친일, 친미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미국에서 열렬한 애국주의와 “매파” 외교 정책은 우파와 잘 붙는 가치로 여겨져 왔지만, 이것도 더 이상 당연하다고 말하기 어려워진 듯합니다. 최근 영미 언론은 “미국을 더 위대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라이벌 국가를 상대로 한 강경책에 환호하던 미국의 극우파가 친러, 친푸틴으로 전향한 현상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27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외부 칼럼니스트의 사설이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필자는 전쟁 와중에서조차 폭스뉴스의 간판 진행자 터커 칼슨나 트럼프 전 대통령이 푸틴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이어가는 것,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큰 폭으로 상승한 푸틴 호감도 조사 결과 등을 들면서, 미국의 우파가 푸틴을 포함한 타국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을 미국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 사진=Stephen Crowley/뉴욕타임스

 

필자는 푸틴의 매력 포인트가 “힘”에 있다면서, 남성성의 위기나 전통적인 성 역할의 붕괴 같은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문화적, 정치적 반대파를 강하게 탄압하고 타협 없이 자기 뜻을 밀어붙이는 푸틴 같은 지도자는 매력적인 존재로 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강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국가가 백인 중심, 기독교 중심, 전통적인 가치 중심이라는 점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미국의 기존 정치인, 주류 엘리트 세력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서방의 문화 엘리트”에 맞서는 푸틴이나 루카셴코 같은 인물은 “우리 편”으로 여겨집니다. 미국 우파에게 러시아는 (실제로 러시아가 백인으로만 이루어진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한 존재로,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또 하나의 문화전쟁 무기로 악용되고 있다고 필자는 우려합니다.

가디언에 실린 3월 1일자 칼럼역시 좀 더 직설적으로 미국 우파가 푸틴의 팬이 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인종차별, 서구 자유주의 타파 등의 가치를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는 만큼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형성된 러시아와 미국 우파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반향실이 되어 전시 가짜뉴스의 형성과 확산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NPR의 지난주 기사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비밀리에 생물학 무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루머의 확산을 보도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침략을 정당화할 구실을 백방으로 찾고 있는 러시아의 구미에 딱 맞는 이 루머는 딱히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한 폭스뉴스의 보도 덕분에 다시 중국 언론에 인용되는 등 “신빙성”을 더해갔습니다. 생물학 무기 연구소는 코로나 초반부터 음모론자들이 밀어온 바이러스 연구소 발생설과 맞물리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었고, 음모론자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러시아는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과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 우크라이나 연구소에 관여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는데, 이를 집중 조명한 곳도 역시 폭스뉴스였습니다. 러시아가 만들어낸 내러티브가 미국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더욱 효과적으로 확산하는 그림일 뿐 아니라, 러시아 정부와 미국 우파가 서로의 주장에 신뢰를 더하기 위한 근거로 서로를 활용하는 형국이 된 셈이죠.

물론 미국 우파가 모두 친러, 친푸틴 성향이 되었다거나 러시아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태에 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도 있고, 여전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합니다. 러시아 문제가 다가오는 11월 중간선거 국면 등에서 우파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국 사회 주변부에 머무르던 극단주의자나 음모론 추종 세력이 외부로부터 전에 없던 동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보수란 곧 반(反)소련이던 냉전이 막을 내린 지 반세기도 채 되지 않았는데, 미국의 이념 지형과 외교 환경은 어떤 면에서 상전벽해라 할 만큼 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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