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팬데믹과 부유세

팟캐스트 아메리카노의 비공식 자문위원 가운데 한 분인 툴르즈 경제대학원의 전도신 교수님이 보내주신 학교 소식지에 실린 인터뷰를 여러 편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그 가운데 첫 번째 인터뷰로, 프리미엄 콘텐츠에는 지난해 10월 20일에 올렸습니다.

툴르즈 경제대학원에는 장 티롤(Jean Tirole) 교수가 있는데, 프랑스 정부는 올리비에 블랑샤(Olivier Blanchard)와 장 티롤 두 석학에게 프랑스(와 유럽, 나아가 전 세계)가 맞닥뜨릴 미래의 경제적인 도전 과제를 망라하고 해법을 모색한 미래전략 보고서를 의뢰한 바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메리카노 팟캐스트에서도 소개했습니다.

올리비에 블랑샤, 장 티롤 교수가 마크롱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고 있다. 출처=TSE 소식지 표지

툴루즈 경제대학원은 지난 5월 말에 “공동선(common good)”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는데, 소식지에는 그에 관한 글들이 함께 실렸습니다. 참가한 학자들 가운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만 6명이나 될 만큼 면면이 화려한 회의였습니다. 발표 내용을 간추린 글들이 시사하는 바가 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소개하려 합니다.

오늘 첫 번째 글에선 지난 2019년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MIT의 아피짓 배네르지(Abhijit Banerjee), 에스더 듀플로(Esther Duflo) 교수 부부의 진단과 제언을 소개합니다. 베네르지, 듀플로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수준의 빈부 격차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며, 현재 터무니없이 적은 부유세를 전 세계가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Q. 팬데믹 때문에 공동선의 보급에 차질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A. 미국 정부가 주도한 백신 개발 계획인 “Operation Warp Speed”는 아직 승인되지 않은 백신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보급한 사례입니다. 문제는 백신 보급이 부자 나라에만 집중됐다는 점입니다. 부자 나라든 가난한 나라든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건 마찬가지죠. 아니, 오히려 가난한 나라일수록 새로운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지난 2월까지 데이터를 보면 인류가 생산한 코로나19 백신 대부분을 부자 나라가 사 갔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주도한 코백스(COVAX) 계획은 예산부터 턱없이 부족했고, 끝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팬데믹에 맞서는 백신은 모두에게 필요한 공동선으로 인식됐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나라 별로 각자도생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이를 끝내 바꿔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죠.

부자 나라들은 대체로 기존 사회보장제도에 추가로 예산을 들여 팬데믹에 맞섰습니다. 유럽과 미국 모두 방역을 위한 봉쇄 조치로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빈곤층과 중산층에 정부가 지원금을 비롯한 안전망을 제공했죠. 이번 일로 얻은 교훈은 앞으로도 유용할 겁니다.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몇 가지 잘못된 통념이 공개적으로 부정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팬데믹 초기에 미국 정부가 적잖은 실업 수당을 지급하자 일각에선 “사람들이 실업 수당 받고 집에서 놀지 다시 일하러 오겠느냐”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왔습니다. 이후 출판된 경제학 연구를 보면 이런 우려는 기우였습니다. 전례 없는 대규모 실업 수당을 지급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노동 공급, 즉 일하려는 사람이 줄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죠. 이번 사례는 좀 더 포용적인 자본주의의 가능성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팬데믹에 맞서 각국 정부가 얼마나 돈을 썼는지 보면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난한 나라들은 GDP의 평균 2% 정도밖에 돈을 못 썼는데, 부자 나라들은 평균 20%를 썼죠. 의료 지원도, 경제적인 지원도 가장 절실했을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가장 지원을 못 받은 셈입니다. 이번 팬데믹에서 드러난 가장 두드러진 세상의 모순 가운데 하나 아닐까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자율이 거의 0에 가깝죠. 그러다 보니 투자처를 찾지 못한 부자들의 자산 규모도 어마어마합니다. IMF 추산에 따르면, 500억 달러만 있으면 전 세계에 코로나19 백신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500억 달러가 적은 돈이 아니긴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의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윳돈 전체에 비하면 그야말로 푼돈에 불과합니다. 지금 경제 시스템은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에 하나 마나 한 수준의 지원을 해놓고 생색내기 좋은 시스템입니다. 이 또한 팬데믹과 함께 명확해졌는데,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를 돕는 데 들이는 자금의 액수를 GDP의 0.7%까지 늘리자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도 지켜지지 못했지만, 만약 OECD 회원국이 GDP의 1%만 원조에 쓴다면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코로나19 백신과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아피짓 베네르지, 에스더 듀플로 교수 부부. 출처=MIT

 

Q. 두 분은 빈곤 퇴치를 위해 부유세를 거둬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어느 정도가 적당한 부유세율인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셨는지요?

A. 저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에는 급진적으로 보이던 부유세 주장이 상식적인 주장이었다는 게 입증됐다고 생각합니다. 세율도 지금 나오는 논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게 책정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유세가 열심히 일할 의욕을 떨어뜨릴 거라는 주장이 있지만, 저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건 아주 공정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게 지금 이 비극의 토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미 소득(income)에 세금을 매겨 거두는데, 자산(wealth)에도 세금을 거두면 이중과세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갑부들, 고액 자산가들의 자산 대부분은 주식이나 부동산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투자된 자산이 알아서 (세금 걱정 없이) 증식하는 구조로 돼 있죠. 이런 갑부들의 자산은 최소한 연 6%씩 불어납니다. 그럼 예를 들어 부유세로 자산의 2%를 거둔다면, 자산가들은 소득의 33%를 세금으로 내는 셈이 되죠. 이렇게 해야 가까스로 갑부들의 실질 세율이 선생님이나 간호사들에게 적용되는 세율과 같아지는 겁니다. 부의 재분배에 대한 의견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지금의 세제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터무니없이 안 걷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가난한 나라 정부는 여전히 세제가 있더라도 세금을 제대로 거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부와 관료제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조세 회피처 등을 악용하는 탈세가 만연한 탓도 있습니다. 다행히 기술이 많이 좋아져서 내야 할 세금을 안 내고 버티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죠. 여러모로 세금을 올려야 할 적당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1인당 GDP와 세금 사이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보통 GDP의 15%를 세금으로 걷습니다. 프랑스는 45%를 세금으로 걷죠. 이러다 보니 의료, 교육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에 정부가 투자할 여력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인프라를 갖추지 못해 팬데믹 같은 상황에 더 취약했었고, 부유한 나라는 상대적으로 더 잘 대비가 돼 있던 거죠.

바이든 대통령이 제안한 전 세계 공통 법인세 방안에 찬성합니다. 세금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공화당이 버티고 있는 미국 상원의 상황을 고려하면 전 세계 법인세안이 통과하더라도 세율은 아주 낮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게 세제 항목에 어떻게든 하나를 밀어 넣으면,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을 때 논의를 거쳐 세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유세도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낮더라도 부유세 항목을 신설할 수만 있어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세금을 거두기 위해 부자들의 자산 규모를 정부가 꾸준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이는 심각한 빈부격차에 관한 논의의 근간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ingppoo

뉴스페퍼민트에서 주로 세계, 스포츠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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