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ndan Mackie, 리얼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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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소속감의 위기가 올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여기에 대응해 왔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손편지가 있었습니다. 초기 산업 사회는 클럽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TV가 있었고,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에서 소속감을 찾고 있습니다.
1950년대 유행한 친밀감 쇼처럼, 오늘날의 준사회적 미디어 역시 친밀감을 목적으로 만들어집니다. 방송인은 대화하듯 말하며, 자신의 사적인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설정된 약점을 밝힙니다. 침실이나 컴퓨터 앞에서 이야기하며, 때로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나타나는 등 시청자가 진짜 친구 사이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보 버냄의 최근 넷플릭스 스페셜은 이 장르의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기 집의 어지러운 스튜디오에 홀로 앉아 (물론 우리와 함께) 외로움을 나타내는 턱수염과 퀭한 눈으로 자기 이야기를 슬프게 털어놓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명과 구도는 완벽합니다. 그는 정확한 각도의 카메라와 전문가 수준의 조명을 바탕으로 독자들이 마치 그가 자기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자기 고백 연기’를 한 것입니다.
1950년대 TV와 라디오가 거실에 놓여있는 커다란 가전기기였다면, 오늘날의 준사회적 미디어는 우리가 버스나 화장실, 침대 등 지루하고 외로운 모든 순간에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게다가 이 미디어는 훨씬 더 구체적인 대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50년대의 대중매체는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이 이득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은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므로 특정한 작은 시장을 목표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다양성은 인터넷 문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가짜 야구 리그, ASMR, 먹방 등 마음에 드는 것을 인터넷에서 발견했을 때 우리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느끼며, 화면 너머 대상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 현대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시청자와의 친밀감이라는 특징은 그 미디어가 경제적 존속을 위해 필요한 대중 확장성과는 긴장 관계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내가 듣는 “마이 브라더, 마이 브라더 앤 미”의 애청자는 나 말고도 수십만, 아니 100만 명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쇼를 이어폰을 끼고 늘 혼자 듣습니다. 맥엘로이 형제들은 실제로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들이 내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오늘날의 준사회적 미디어는 이러한 긴장감을 콘텐츠 제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곧, 유명인들이 언제라도 무대에서 내려와 우리를 알아보고, 우리를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능동적안 참여자로 바꿔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테일러 스위프트는 팬의 결혼식이나 신부 파티와 같은 행사에 깜짝 등장합니다. 서브 장르의 작은 시장에서 이러한 능동적 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패스트푸드 리뷰를 하는 도우보이즈(Doughboys)는 모든 에피소드를 팬이 직접 만든 두 개의 콘텐츠로 시작합니다. 이는 콘텐츠 제작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유명인과 팬 사이에 직접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연예인 후원 사이트인 패트리온, 온리팬스, 트위치 등은 이러한 친밀감을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컴퓨터로 만든 아바타로 방송하는 이를 일컫는 VTuber 체스터 디 오터(Chester the Otter)는 시청자들이 하녀복(MAID COSTUME)을 주문하면 하녀복을 입습니다. 돈을 내는 시청자는 더 높은 등급의 팬으로 올라갑니다. 싱어송라이터인 아만다 팔머의 팬들은 그녀가 정기적으로 여는 채팅방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옵니다. 돈을 낸 팬들은 채팅방 참석뿐만 아니라 그녀가 연주 여행 중에 보내는 엽서를 받아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를 거래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창작자를 지원하는 이유는 친구이기 때문이며, 질문에 답하거나 방송 중 이름을 부르고, 엽서를 보내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는 창작자의 보답은 우정의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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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사회성이 채워주겠다고 약속하는 욕망은 만족을 모르는 욕망입니다. 팬들은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이 보답받기를 바라며, 연예인이 자신을 한 명의 친구로, 그것도 필요한 친구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로 대접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특성상 연예인에게 팬이란 그저 끊임없이 변하는 숫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준사회성 미디어가 가진 상호작용이라는 특징은 이 불가능한 친구 관계를 마치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우리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팬의 결혼식에 깜짝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어쩌면 내 결혼식에도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내가 체스터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언젠가 그들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않을까요?
오늘날 팬들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은 바로 연예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듣는 ‘마이 브라더, 마이 브라더 앤 미’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멤버 중 한 명이 한 코너를 맡고 재미가 없어지자 레딧 게시판은 그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득 찼고, 이는 곧, 그 멤버의 인간성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었습니다. 팬들은 그의 성격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를 비판할 거리는 무궁무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와 그렇게 가까운 척했다는 사실에, 또 정말 중요한 때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데 화를 냈습니다.
호튼과 볼은 친밀감 쇼를 보는 외로운 사람들을 무자비한 방송인들에게 속은 순진한 풋내기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준사회성 미디어를 비판하는 이들 또한 연예인과 이들이 활동하는 플랫폼이 외로운 팬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도 주로 그런 분석에서 출발합니다. 곧, 팬들을 친구처럼 느끼게 하는 연예인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이 스스로 “인터넷상의 가장 친한 친구”라 부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더욱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미디어 소비 습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팬들 또한 그들의 소비 방식에 책임이 있고 비판받을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물론 팬의 세상은 연예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팬클럽은 팬들에게 소속감을 주는 커뮤니티이기도 합니다. 팬아트, 팬픽션, 팬크리티시즘 등에 쏟아지는 창작열은 압도적입니다. 심지어 팬 커뮤니티는 자정 능력도 갖췄습니다. 유튜브 비평가인 사라 Z가 준사회성 이론으로 맥엘로이 형제들에 대한 팬들의 비판을 설명하자, 레딧의 게시판에서도 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V튜버, 존 멀레이니, K팝 등의 팬 커뮤니티에서도 준사회성이 가지는 위험요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팬덤의 긍정적 효과에는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인터넷 팬클럽은 매우 협력적인 커뮤니티로 보이지만, 이는 모두가 인기 있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셜미디어 자체의 특성 때문에 그럴 뿐입니다. 실제 소셜 네트워크 사용자의 90%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팬카페가 활성화된 이유는 준사회적 관계 내의 또다른 준사회적 관계 때문입니다. 곧 대부분 팬은 특정한 소수 팬의 활동을 수동적으로 소비합니다. 대다수의 팬은 이 슈퍼 팬이 만들어내는 팬아트, 팬크리티시즘, 그리고 연예인에 대한 사랑을 마치 연예인 자체를 즐기듯 수동적으로 즐깁니다.
이는 소셜미디어가 한때 약속한,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서로 성장하는 그런 공간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보다는 친구들의 대화를 창밖에서 쳐다보며 그들의 농담을 듣고 웃지만, 그들은 당신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런 상황과 더 비슷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준사회적 미디어의 발호는 인터넷이 가진 준사회성의 문제를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은 심지어 진짜 친구들과의 상호작용까지도 준사회적 관계로 만듭니다. 우리는 아는 이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진들을 계속 스크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셜미디어를 하는 때는 당연히 다른 무언가를 할 때가 아니라 지루하거나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혼자 앉아 있을 때입니다.
이제 많은 이들이 마치 1950년대 친밀감 쇼를 방송하는 것 같은 콘텐츠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있습니다. 곧, 그 콘텐츠를 보는 이들이 자신을 가까운 친구로 여기게끔 하는 것입니다.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콘텐츠를 보는 이가 듣도록 정면에서 이야기합니다. 우정을 나타내는 행동을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저 사람이 혼자 있으니 여기에 반응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응하는 이유는 상대의 그런 행동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남에게 보이고 싶은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 그리고 화면상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여기에 반응합니다. 결국 준사회적 미디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화면 스크롤을 통해 우리의 주의를 끌고 우리를 유혹하는, 일시적이고 일방적인 상호작용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우리의 모습인, 개인이자 친구로서의 존재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곧, 준사회적 미디어의 형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소속감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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