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David Olusoga)
“통합의 구심점”
민주주의 선거로 뽑힌 권력이 아니라 혈통을 기준으로 왕좌를 물려받는 입헌 군주가 현대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군주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왕실은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왕이나 왕은 정치를 초월한 존재로 ‘일개’ 대통령이나 총리가 절대 할 수 없는 일도 해내는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죠.
군주제 옹호론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저 주장이 틀렸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 또 하나의 사건이 역사에 기록됐습니다. 영국 왕실을 나와 독립한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 부부가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와 진행한 인터뷰가 전 세계에 방영된 지 일주일이 좀 더 지났습니다. 폭풍 같은 인터뷰를 통해 같은 시대를 사는 영국 국민이 서로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사는지도 극명히 드러났습니다. 지금 영국 왕실은 통합의 구심점은커녕 나라를 갈라놓는 분열의 원흉처럼 보입니다.
젊은이들과 유색인종은 압도적으로 메건 마클 왕자비를 지지합니다. 인종주의라는 구시대 악습을 조금도 버리지 못한 타블로이드 황색지의 횡포 때문에 젊은 부부가 왕실에서 나와 캘리포니아로 도망치듯 떠나는 모습을 이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죠. 그러나 같은 걸 보고도 전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 타블로이드의 가십을 큰 비판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기성세대들이죠. 이들은 문제는 인종주의가 아니라 유별난 대접을 받으려던 마클에게 있다며, 인종주의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예전엔 타블로이드가 주로 가판대에 놓인 신문을 일컫는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특히 타블로이드 TV라 부를 수 있는 매체도 해악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마클이 제기한 왕실 내 인종주의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경쟁적으로 이에 관한 내용을 자극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취재 윤리나 기준 같은 건 없는 집단입니다.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교제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해리는 기어이 왕실의 이단아가 될 작정일까?” 따위의 제목을 뽑거나, “(갱스터랩 그룹 N.W.A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콤프턴 출신(Straight Outta Compton)” 스크린에서 막 나온 것 같다”며, 마클의 피부색을 곧바로 노골적으로 들먹이던 이들입니다.
타블로이드지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는 대부분 흑인에겐 너무나 자명하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타블로이드지는 흑인 문화인 갱스터 랩 속의 서로 비방하는 모습에서 모티브를 빌려온 풍자일 뿐이라며, 이 정도 풍자를 인종주의로 매도하는 건 언론 탄압이라며 도리어 역정을 냅니다. 문제는 이 두 집단이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타블로이드지 기자 중에 흑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아마도 손에 꼽을 겁니다. 저열한 인종주의 시각을 여과 없이 그려내도 이게 풍자가 아니라 잘못된 혐오 표현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타블로이드지의 편집국 안에는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흑인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텐데, 흑인 중엔 의사결정권을 지닌 편집장은 말할 것도 없고 평기자도 거의 없으니까요. 이러다 보니 이렇게 같은 현상을 정반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한 사회 안에서 평행 우주에 사는 겁니다. 타블로이드가 아니라 언론 전체를 살펴봐도 다양성은 한참 모자랍니다. 영국인 가운데 흑인은 3%입니다. 그런데 언론인 가운데 흑인은 0.2%에 불과하죠.
스스로 지닌 편견에 갇혀 풍자와 혐오 표현을 분간하지 못하며, 상식적인 잣대를 일러줄 만한 이들과도 단절된 사람들이 언론사 편집국의 수장 자리에 앉아 무엇이 인종주의이고 무엇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기어이 영국 언론 편집인 협회(Society of Editors)의 이언 머레이 회장은 영국 언론 어디에도 인종주의는 없다며 스스로 무죄를 주장하는 성명을 내기에 이릅니다. 머레이는 이 어처구니없는 성명에 이어 메건 마클 왕자비를 향해 “인종주의를 지적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상황을 몰상식한 인민재판으로 몰고 가려는 저의를 드러냈죠.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근거가 이미 차고 넘치는 자명한 일인데, 근거를 대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은 아마 정작 근거를 대면 또 그건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할 겁니다. 인종주의가 실재한다는 걸 입증해야 할 책임이 인종차별 피해자에게 있는 것도 물론 아니고요.
구시대의 악습인 인종주의를 떨쳐내지 못한 타블로이드는 이윤을 챙기고 더 오래 살아남을 기회마저 스스로 걷어차 버린 셈이 됐습니다. 메건 마클을 왕자비로 들인 일은 영국 왕실의 브랜드와 이미지를 쇄신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정말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죠. 군주제에 기본적으로 회의를 품고 있던 젊은 세대에게 왕실과 군주제가 어쨌든 조금이나마 쓸모가 있다는 걸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한때 커트 코베인이 입고 나온 카디건에 사람들이 열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카디건 회사처럼 이번에 영국 왕실도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대영제국의 기세가 한창이던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있을 때 영국의 일원이었던 곳을 뜻하는 영연방(Commonwealth)의 인구는 24억 명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이 흑인 아니면 라티노죠. 이들은 자신과 마클을 어느 정도 동일시하며 마클의 왕실 입성에 잔뜩 들떴을 겁니다. 그 기대는 고스란히 실망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실이 마클 왕자비를 감싸고 끌어안기는커녕 찍어누르고 내치는 모습에 이들은 적잖은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왕실의 평판은 회복할 수 없는 수준으로 땅에 떨어졌습니다. 경악스럽고 어리숙한 대처였으며, 홍보와 소통의 재앙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로 먹고사는 타블로이드는 여전히 헛소리만 해댔습니다.
왕실과 타블로이드는 왜 이런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을까요? 당장 이게 기회라는 걸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미래를 똑바로 내다볼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수많은 기관과 제도가 그렇듯, 영국 왕실이나 타블로이드는 여전히 과거의 영화에 얽매여 현실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현재 영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논쟁이 역사를 둘러싼 논쟁으로 귀결됩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그래서 어떻게 해야 세계 속의 멋진 영국을 다시 만들어나갈지 논의하다 보면 우리는 어김없이 과거에 매듭을 짓고 해결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운동을 예로 들어보죠. 21세기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종주의를 규탄하며 새롭게 불붙은 BLM 운동은 영국에서는 동상이나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둘러싼 논쟁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작지만 위대한 나라를 뜻하며,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우월하다는 배타적 민족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리틀 잉글랜드(Little England)에 부합하는 영국의 역사를 조명하는 일이라면 타블로이드가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영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엄존한다는 사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최소한 인정하며 그 토대와 발판 위에서 번영한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좋은 것만 취하고 어두운 과거는 멋대로 방치해둔 대가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거죠. 지난여름, 영국의 BLM 시위대는 먼저 브리스틀에 있던 17세기 악명 높은 노예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려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이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인종차별 이력을 부각해 비판했죠. 콜스턴과 처칠 사이에는 356년이란 세월이 있었지만, 인종주의는 끄떡없이 살아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역사를 바로 마주할 용기라고는 한 줌도 없는 보수 반동 세력의 반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기존의 체제에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백인 남성들은 마클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왕실을 비호하고 나섰습니다. 극우 정치인 나이젤 파라지와 미국식의 수준 낮은 케이블 TV 정치쇼를 영국에 들여온 피어스 모건 같은 인물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피어스 모건은 최근 자주 그랬듯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 쏟아낸 탓에 따로 평가하기도 어렵습니다. 나이젤 파라지는 “인류 역사에서 지금껏 그 누구도 영국 왕실보다 유색인종을 위해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입헌 군주제가 정착된 뒤 현대의 왕실만 놓고 한 이야기라도 넬슨 만델라가, 로자 파크스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 말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입헌 군주 이전 영국 왕실의 역사 전체를 놓고 한 말이라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 끔찍한 거짓말입니다. 당장 왕실이 직접 노예무역을 관장하던 때의 왕만 해도 엘리자베스 1세, 찰스 2세, 제임스 2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지 3세와 윌리엄 4세는 노예무역을 비호했죠.
역사는 선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다가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제도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원래 마주하기 두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지금은 영국이 용기를 내서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을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미래를 향한 새 출발은 요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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