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계 미국인 칼럼니스트 제프 양(Jeff Yang)이 CNN에 쓴 칼럼입니다.
침묵할 때는 왜 침묵하는지 그 이유조차 말하기 어렵다. 이는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침묵도 하나, 둘 모이면 퍼져나간다. 그리고 침묵하는 이들 개개인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침묵하는 집단은 그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그 문제를 의도적으로 피하려 한다는 오해를 산다. 그리고 결국에는 침묵은 망각으로 이어진다.
시인 캐시 박 홍 씨의 책 “Minor Feelings: An Asian American Reckoning”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침묵의 본질적인 속성과 결과에 관해 이보다 더 명료하게 설명한 문장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살아가며 누구나 상처를 입습니다. 침묵은 좀처럼 아물지 않는 상처에 난 흉터와도 같습니다. 어쩌면 침묵은 우리 선조들이 미국이란 낯선 나라에 건너와서 본능적으로 터득한 미덕일지도 모릅니다. 모국어가 아닌 말을 하다 보면 겪을 수밖에 없는 어색함을 숨기고자 그랬을 테고, 사소한 다툼을 큰 싸움으로 키우느니 그냥 참고 넘어가는 편이 낫다는 씁쓸한 삶의 지혜가 침묵으로 표현되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정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속담으로 비유하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겁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뜻과 비슷한 “The squeaky wheel gets the grease(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퀴에만 기름칠한다)” 같은 속담은 아시아계 미국인에게는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중요한 문제에 침묵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효과가 크지도 않고 오래 가지도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침묵의 대가로 잠깐은 피해를 면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캐시 박 홍이 지적한 것처럼 진실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흉측한 집단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조지 플로이드 씨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에 수많은 사람이 분노했습니다. 체중을 힘껏 실어 플로이드 씨의 목을 누르고 있던 데릭 쇼빈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건 쇼빈의 행동을 제지하기는커녕 같이 플로이드 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동료 경찰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아시아계 미국인 투 타오도 있었습니다. 타오는 이 모든 장면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지켜만 봤습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오히려 시민들을 밀쳐내며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죠.
“맥박이 뛰는지 좀 확인해보라고!”
시민들이 간절하게 소리를 쳤지만, 타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플로이드 씨가 어떻게 되는지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상황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타오는 미네소타주 사법당국이 체포영장을 발부하자마자 구속됐습니다. 플로이드 씨가 사망하는 장면 속 타오의 모습을 보기가 더 괴로웠던 이유는 진실에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타오가 홀로 살인을 방조하고 막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쇼빈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막을 힘이 있었으며,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던 타오가 보인 침묵은 정말 보고 있기 괴로웠습니다. 또한, 타오의 침묵은 왜 지금이야말로 아시아계 미국인이 이번 일에 침묵해선 안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코로나19로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와 인종차별이 두드러졌던 게 불과 몇 달 전의 일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에 사는 소수 인종으로서 분명 편견과 차별의 피해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미국에 사는 흑인에 비하면 아시아계 미국인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는 구호를 적극적으로 외치며 시위에 동참한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미국 안에서 경제적, 군사적 위기가 찾아오면 반(反) 아시아인 정서가 강해지고, 위기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 반감도 잦아듭니다. 반면 흑인을 향한 차별, 부당한 압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늘 있었습니다. 마치 해류의 방향은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특권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그 권리를 종종 잊어버리고,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차별은 누구의 인식 여부와 관계없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도 우리가 누리는 특권을 인정하기 불편해합니다. 특히 지금 이만큼 먹고살기까지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위의 조상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를 생각하면, 또 지금도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겪는 미묘한 차별(microaggressions)이나 더 대놓고 일어나는 혐오 범죄를 생각하면 아시아인이 무슨 특권을 누리느냐며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은 전쟁과 재앙, 독재자의 폭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더 좋은 교육을 받으려고, 아니면 경제적인 기회를 찾아온 경우도 많죠. 아시아계 미국인 중에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짐칸에 실려, 노예 신분으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의 후손은 없습니다. 아시아인은 미국에서 250년 가까운 세월을 인명부 대신 재산 목록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흑인들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도록 제도적으로 차별해도 되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죄다 불 질러도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된 지 50년이 더 지났지만,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의 기득권은 이전에 350년 동안 일어났던 끔찍한 일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망각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좀 더 솔직해집시다. 이 역사를 부정하고 묵살하고, 진실에 침묵한 이들은 누구든 오늘날 흑인들이 차별받고 공격을 당하고 끔찍이 살해당하는 현실에 책임이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극심한 편견에 눈을 감으면,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하지 않냐”는 물타기에 놀아나면, 인종차별의 민낯을 바로 보지 않고 이를 사랑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로 대충 얼버무리려 하면 결국 이 조직적인 차별과 범죄에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흑인이 받는 차별을 더 소리 높여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는 건 흑인이 아닌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않으면 국가의 폭력과 구조적인 인종차별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희생자는 계속해서 나올 겁니다.
에릭 가너. 마이클 브라운. 아카이 걸리. 타미르 라이스. 산드라 블랜드. 필ㄹ란도 캐스틸. 보탬 진. 흑인이 백인의 손에 살해될 때마다 전국적으로 분노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내 사그라졌고, 그 자리는 무관심과 회피가 대체했고, 또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브레오나 테일러와 아흐무드 아버리,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까지 무고한 흑인이 잇달아 살해됐다는 소식은 마침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평소보다 뉴스를 더 많이 보게 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흑인들만, 젊은이들만 그런 것도 아니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대도시에서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지금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들은 인종, 민족, 성별, 연령, 계급을 가리지 않는, 우리 모두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아시아계 미국인은 흑인들과 단단히 연대해야 합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의 기득권이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해 붙인 “모범적인 소수 인종(good minority)”이라는 별명 때문에라도 이번엔 더욱 침묵해선 안 됩니다.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며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서, 걸핏하면 불만을 드러내고 시위하는 골치 아픈 이들이 아니라서 ‘모범적’이라는 배지를 얻은 겁니다. 400년 넘게 계속된 흑인들을 향한 끔찍한 차별을 덮고 지워내는 ‘마법의 지우개’로 아시아계 미국인이 사용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로 이번만큼은 침묵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민권법의 권리는 흑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명백히 부당한 사실에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부당한 차별의 칼날이 우리를 향할 때 다른 이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지켜줄 거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말콤X와 마틴 루터킹 주니어가 베트남전쟁이 더러운 전쟁이라고 비난해줬기에, 또 아시아인을 향한 편견을 바로잡아주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겁니다. 제시 잭슨 목사가 1982년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동기로 살해된 빈센트 친 사건을 널리 알렸던 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에 사는 아시아 사람들의 정체성을 담은 아시아계 미국인(Asian American)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계기도 흑인의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68년 UC 버클리 학생이었던 유지 이치오카와 엠마 지는 흑표당(Black Panther)을 만든 인물 중 한 명인 인권운동가 휴이 뉴튼이 투옥되자 이들에게 연대하는 의미에서 아시아 출신 유학생을 모아 조직을 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 모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캐시 박 홍의 문장을 하나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의식이 진정 해방되려면 우리는 먼저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만 그 대가로 우리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아시아인은 늘 주류에 편입되는 걸 약속받았지만, 아직 그 약속이 이행되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이 사회의 기득권은 우리를 계속해서 자신들이 필요한 곳에 가져다 쓰고 방패막이로 활용할 겁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외부인인가? 아니면 원래 우리는 본질적으로 미국인인가? 다른 인종과 달리 아시아인은 ‘거의 백인’이라 부를 만한 특징이 있나? 반대로 유색인종과 연대하는 게 더 나은가? 지금 우리를 향해 던져지는 수많은 질문에 분명히 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더는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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