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 동안 미국 정치의 중심에는 문화 전쟁이 있었다. 사람들은 문화 전쟁의 시작으로 흔히 1960년대의 사회 변혁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첫 번째 문화 전쟁, 즉 문화 전쟁 1.0은 1950년대 기독교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고자 한 기독교 신도들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2013년, 미국의 대법원이 동성결혼 금지를 부분 위헌으로 판결하고 2015년 오버거펠 대 호지스 사건에서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주법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첫 번째 문화 전쟁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으로, 창조론을 생물학적 진화론의 대안으로 내세우거나 기독교적 가치를 공적 영역에서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를 두고 일어났다. 그러나 문화 전쟁 2.0에서는 초자연에 대한 믿음이나 형이상학, 심지어 종교조차도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새로운 문화 전쟁에서 기독교 신앙과 도덕을 대체한 것은 계몽의 원칙 위에 세워진 오늘날의 사회를 훨씬 더 강력하게 위협하는 새로운 적이다.
문화 전쟁 2.0은 다음의 세 축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첫째 새로운 교전 규칙(rule of engagement), 둘째 진리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그리고 셋째 각자의 세계관에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 미치는 영향이라는 세 축이다. 이 세 축을 통해 어떻게 문화 전쟁 2.0이 과거의 이념적 주적들을 하나의 동맹으로 묶었는지 살펴보자. 이를 거대한 재정렬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교전 규칙
교전 규칙은 의견 차가 있을 때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문화 전쟁 1.0에서 진화 생물학자들이 지질학적 연대측정법을 이용해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 내용을 대학에서 강연할 때, 창조론자들은 그 연대측정법에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을 제안하거나 혹은 질문·답변 시간에 그 내용을 지적했다.
그러나 문화 전쟁 2.0 시대에는 의견이 다른 강연자의 강연 기회를 봉쇄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강연을 취소하는 데 실패하면 비판자들은 고함을 지르거나 무언가로 큰 소리를 내거나, 화재경보기를 작동하거나, 마이크 스피커 선을 자르는 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관철한다. 여기서는 강연자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보다도 강연자의 의견을 청중에 전달하는 것 자체를 막는 것이 목표다.
오늘날 좌파의 문화 전사들은 새로운 도덕 기준을 따르지 않는 강연자들의 강연만 방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계의 논문집을 포함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생각이 발견되는 곳이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싸움을 시작한다. 2017년, 포틀랜드 주립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브루스 길리는 “계간 제3세계(Third World Quarterly)”에 “식민지주의에 대한 변호(The Case for Colonialism)”라는 논문을 실었다. 문화 전쟁 1.0 시대라면 학문적 논쟁이 벌어졌겠지만, 다른 학자들은 포틀랜드 주립대학에 그에게 보장됐던 정년을 취소하고 그를 해고할 것을, 심지어 그의 박사 학위를 거두어들이라고 요청했다. 그의 논문은 학술지의 편집자가 “심각한 수준의 폭력 협박을” 당한 끝에 철회되었다.
기독교 사회에는 아주 오랜 검열의 역사가 있다. 이는 최근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학계의 논문을 금지하려는 시도는 문화 전쟁 1.0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이와 유사한 시도는 문화 전쟁 이전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예를 들어 1925년 테네시주에서 제정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만든 버틀러 법과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을 들 수 있다. 물론 문화 전쟁 1.0 시대에도 종교인들은 소설이나 영화가 신성모독이거나 음란하면 이를 금지하려 했다. 1988년 제작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첫 번째 문화 전쟁 당시 기독교인들이 진화생물학자들의 직업을 뺐거나 박사 학위를 빼앗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논쟁을 원했고,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알리려 했다.
문화 전쟁 2.0을 관통하는, 그리고 많은 선한 의도의 활동가들이 동의하는 중요한 아이디어 하나는 말이 곧 폭력이라는 것이다. 즉, 연설이 폭력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설을 막기 위해 우리가 물리적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거의 무차별적으로 붙이는 “혐오 표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충분한 대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얼굴을 한 대 맞았다면 “그만둬 주시겠습니까?”라든지, “그것은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당한 대응이 아닐 것이다. 곧,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언어에 대해 다른 언어, 곧 반박문이나 논쟁, 질문·답변 시간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교전 규칙이 새로 생겼다. 말이 곧 폭력이라면, 이는 말이 아닌 다른 방법, 곧 주먹질이나 밀크쉐이크 던지기, 혹은 공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를 금지하거나 막아 세워야 한다.
진리 대응설
진리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은 기본적으로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며 우리는 근거와 논리를 통해 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현실과 일치하는 가정을 토대로 확실한 지식을 쌓는다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용어가 “진리 대응설”이라 불리는 이유는 어떤 진술이 실제 현실과 대응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참이 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진술은 거짓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문화 전쟁 1.0 시대에는 양측 모두 진리 대응설을 받아들였다. 2014년, 문화 전쟁 1.0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과학의 추종자” 빌 나이는 “창조과학캠프(Answers in Genesis)”의 켄 함과 지구의 나이를 두고 토론을 벌였고, 빌 나이는 켄 함이 주장하는 것보다 지구는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여러 근거를 들어 주장했다. 그들의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진실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고, 과학과 이성 또는 켄 함의 경우, 믿음과 성경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화 전쟁 1.0에 맞게, 이들은 교전 수칙, 곧 그 과정을 서로 존중하는 토론 형식에 동의했다.
문화 전쟁 2.0 시대에는 진리 대응설을 양측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곧 어떤 객관적 세상에 대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더 좋고 나쁜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 적어도 한쪽은 진리 대응설을 ‘주관적 지식’으로 대체했다. 이는 단순히 객관을 주관으로 바꾼 것이 아니다. 문화 전쟁 2.0에서 한쪽은 지식을 이해하는 정도는 인종, 성, 장애, 성적 지향 등 정체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억압 변수(oppression variables)”가 많을수록 현실에 대한 이해도 더욱 명확해진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이성애자 백인 남성은 세상을 흑백으로 바라본다. 각각의 억압 변수는 여기에 다른 색을 더한다. 이성애자 흑인 남성은 흑백에 파란색이 더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동성애자 흑인 여성은 세상을 흑백, 청색, 오렌지색으로 바라본다.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Trans non-binary, 역주: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지 않는 성)에 장애가 있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흑인 이민자는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바라보며, 따라서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문화 전쟁 2.0에서 진리 대응설은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적절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리 자체에 대한 접근이 아예 불가능해졌다.
상호교차성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용어는 컬럼비아 법대와 UCLA 법학 교수인 킴벌리 크렌쇼가 정의한 용어다. 그 핵심은 흑인과 동성애자, 여성과 같은 독립적으로 보이는 정체성이 서로 중첩되고 조합되면서 한 사람의 억압 경험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에게 주어지는 억압과는 차원이 다른 억압을 경험한다. 상호교차성주의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호교차성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정체성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특정한 집단은 억압받는 반면 또 다른 집단(대표적으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어떤 타고난 이익 혹은 “특권”을 누리는지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상호교차성이라 주장한다.
상호교차성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문화 전쟁 2.0의 진영을 결정한다. 구체적으로 이 문화 전쟁에서 개인이 어느 편에 속하느냐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법적, 경제적, 그리고 교육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호교차성을 얼마나 적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렸다. 상호교차성주의자들은 사회 정의와 형평성 유지를 위해, 그리고 인종 차별과 동성애 혐오와 같은 지금도 진행 중인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상호교차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것은 지식 자체가 정체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 크렌쇼의 생각은 사람이 어떻게 특정한 형태의 억압을 경험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유용한 도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효과는 거기까지다. 사회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개인의 권리와 보편적인 원칙을 강조해온 기존의 진보적 입장을 버리고 상호교차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택해야 할 그 어떤 도덕적, 인식론적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제도를 만드는 데 상호교차성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뜨개질 클럽에서 의료계, 심지어 남부 침례교 행사에서도 문제는 발생한다. 상호교차성은 지금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있다. 많은 젊은 밀레니얼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상호교차성의 눈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 베이비부머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다른 어떤 관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확고하게 답한다.
거대한 재정렬
이 지점에서 사태는 기이해지기 시작했다.
진리대응설을 받아들이는 이들(설사 이 이론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은 전통적인 교전 규칙인 논쟁, 토론, 대화에 동의하며, 상호교차성이 진리에 이르기 위해 꼭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집단의 학자들은 때로 입장이론(standpoint theory)의 변형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이들이 문화 전쟁 2.0의 한 진영을 맡고 있으며, 다수의 진보 무신론자와 보수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전쟁의 다른 진영은 진리대응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며, 유해하거나 잠재적으로 해를 입힐 수 있는 연설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상호교차적이고 변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도 무신론자와 기독교인들이 있다. 단지 상호교차성에 의해 “깨어난” 무신론자와 상호교차성에 의해 “깨어난” 기독교인일 뿐이다.
참고로 나는 상호교차성을 인정하지 않는 진보 무신론자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고 믿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어떤 사실이 인종이나 성과 무관하게 참과 거짓이며, 또 토론의 가치를 인정하고 기본적인 교전 규칙을 지킨다면, 그는 설사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인종과 성이 객관적 진실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반대 진영의 해로운 의견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압해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 이보다는 나와 더 가까운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이다.
많은 보수 기독교인은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진보적 무신론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문화 전쟁 2.0의 거대한 재정렬이 그렇게 기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세상은 더는 진보와 무신론자 대 보수·기독교인의 대결이 아니다. 새로운 전쟁은 일부 무신론자와 일부 기독교인 대 다른 일부 무신론자와 일부 기독교인의 대결이 되었다. 그리고 각각은 이 전쟁의 결과가 서구 문명의 미래를 결정지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서구 문명의 미래는 이 문화 전쟁 2.0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바뀔 것이다.
결론
어쩌면 아직 우리가 구별해내지 못한 다른 특징이 이 전쟁의 기저에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주제에 대해 나는 내가 지금 생각하는 내용을 썼지만, 아직은 전쟁의 일부만 그 모습을 드러냈기에 이 글은 불완전하다. 이 전쟁의 최종적인 결판은 인지적 자유(cognitive liberty)를 지키며 현실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이를 장려하는 문화를 유지하려는 이들과 이를 파괴하려는, 적어도 그 영역을 축소시키려는 이들과 싸움에서 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이르고, 언젠가 여기에 대해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아메리칸 마인드, Peter Boghos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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