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중에 무수히 많이 널려 있습니다. 야망을 품고, 부자가 되어야 하며, 성공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야 합니다. 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니 게을리하지 말 것,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필수입니다. 물론 결혼은 일부일처제의 관습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 한 명하고만 해야 하죠.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복잡한 세상을 묵묵히 헤쳐나갈 길잡이처럼 사용하다 보면 좀 더 편하게 삶을 살게 해주는 지침입니다. 어쩌면 이 조언들을 따라가다 보면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소위 ‘다 겪어보고 하는 진심 어린 조언’들은 진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더라도 오늘날, 지금을 살아가는 내가 길잡이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옛날 관습에 기댄 말일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지혜로운 길잡이였을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 말일 때도 많죠. 그래서 간혹 행복을 찾아가는 등불이 되어주어야 할 조언들이 한없이 불편하고 쓸데없는 부담을 주며, 불화를 낳기도 합니다. 과감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류의 조언은 득보다 실이 많은, 안 하느니만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제가 겪은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대학교 교수가 된 제가 학자란 모름지기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시선과 압력, 조언을 맞닥뜨렸던 이야기들이죠. 유쾌하게 마무리되기 어려운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2년 전의 일입니다. 웨일스의 헤이온와이(Hay-on-Wye)에서 열린 철학/음악 축제(HowTheLightGetsIn festival)에서 “감정이냐 이성이냐”를 주제로 한 토론에 참석했습니다. 흥미로운 토론을 마치고 배를 좀 채우려고 나왔는데,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책 <행복 설계(Happiness By Design)>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며 기분 좋게 말을 시작한 그 남자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나저나 교수님은 왜 서민층, 노동자계급 출신 영웅이라는 걸 자꾸 드러내려 하는 거죠? 책에서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요.”
보통 영웅이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잘 없지만, 이 상황에서는 영웅 앞에 붙는 수식어도 좀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제가 무언가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삐딱하게 말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나면 행동거지를 바꿔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지적해주신 것이 말하는 중간에 비속어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된 그 날 토론에서도 두 차례 정도 “fuck”이란 단어를 쓰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비속어를 쓰면 안 되는 건지 들어보니 이 사람의 논리는 비속어를 쓴다는 건 그만큼 상황을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데 필요한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지능이 낮다는 걸 만천하에 광고하는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한 것이지 사실 비속어를 쓰는 것과 지능 사이에 정말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해치려는 의도가 명백한 상황에서 섞여 나오는 욕설은 위험하고 해롭죠. 그러나 흥분된 감정을 전달하거나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비속어는 다릅니다. 이럴 때는 감정 표현의 맛을 살리고 원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데 아주 유용하죠. 그러니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헛소리입니다.
다시 저를 다짜고짜 가르치려 들었던 50대 남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이 남자는 런던정경대학교의 교수라는 제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면 저를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으려는 많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더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름지기 중산층의 번듯한 직업을 가진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문화적 담론을 그대로 읊은 겁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사회적 담론이 시절이 바뀌는 동안 그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곤 합니다. 오히려 권력 구조, 문화, 법, 가족, 언론, 역사적 사례와 일화, 심지어 진화론을 차용한 설명, 자연선택 이론을 들먹이면서까지 이런 담론은 강화되어 사실상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이 담론은 우리 안에 타고난 욕망을 일정 부분 채워줄 뿐 아니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길잡이로 삼을 만한 원칙과 일련의 사고방식을 세우고 다져줍니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거나 혼란스럽고 고민이 될 때 이 담론을 살펴보면 언제나 단순하지만 명확한 정답, 고민 없이 따라가면 그만인 쉬운 길이 있는 겁니다. ‘그래, 다들 저렇게 살아온 덕분에 굳어진 관습이니 나도 저 길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사람들은 담론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라가려 할 뿐 아니라,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제지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교수가 욕설이나 해서 되겠냐고 나무라던 그 남자처럼 말이죠.
이 사람이 제 말투와 행동을 보고 나타낸 반응을 보면서 저는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커다란 덫을 떠올립니다. 저는 여기에 “담론의 덫(narrative trap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담론의 덫에 빠지면 이 세상에 완벽한 삶이라는 게 존재한다, 어떻게 사느냐에는 정답과 오답이 있다는 착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부와 성공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대표적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것들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한없이 불안하고 우울해하며 쉽사리 절망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부와 성공을 좇지 말자고 제안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부와 성공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지금 내가 얼마나 부유한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고 성공했는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더 많은 부를, 더 큰 성공을 원하도록 내몰기 때문에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금 행복하더라도 돈이 좀 더 있으면, 다음 단계의 성공을 이루면 더 행복해질 거라는 가정이 끝없는 욕망의 굴레를 만듭니다. 이 가정은 틀렸습니다. 재산이 많아질수록, 성공을 이룰수록 얻게 되는 행복의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행복하지 않거나 오히려 불행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오히려 “더 많이” 대신 “이 정도면 됐어”라며 욕망의 굴레를 멈춰 세우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디언, Paul Dolan)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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