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합리화 기제는 우리가 내린 선택에 따라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곤 합니다. 그 선택이란 무엇을 배우거나 어떤 것을 깊이 이해하거나 다른 시각으로 보는 관점을 기르는 것처럼 대개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의 결과 알게 된 사실이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 믿고 있던 것과 정반대라면 어떻게 될까요? 무언가를 배우고 나서 보니 지금껏 나쁘다고 알고 있던 것이 좋아지게 되면 어떨까요?
2013년부터 시작된 미국 TV 드라마 <더 아메리칸(The Americans)>에 나오는 러시아 스파이 제닝스 부부 역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극 중 제닝스 부부는 냉전이 끝나기 전인 1980년대 미국에 잠입해 미국인 행세를 하며 간첩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해져야 하는 사람들은 부부가 역겹고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관을 지니고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좋든 싫든 제닝스 부부는 간첩 임무를 위해 속으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해대는 사람들과 같이 웃고 즐기며 때로는 그런 생각에 맞장구도 쳐줘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자연히 자기가 이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는 이들과 조금씩 동화되지는 않을지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을 가만히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면도 있다고 생각하게 돼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기도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척하다 보면 원래 진짜 자기 생각과 세계관은 다소 옅어지고 지워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는 사례는 사실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친구가 보라고 추천해준 다큐멘터리 내용이 알고 보니 가짜뉴스로 도배된 선전물일 수도 있고, 관심이 가서 전공으로 택하려던 학문이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전제가 내 신념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스스로 듣기 거북한, 보기 싫은 관점에 나를 노출한 셈이 됩니다. 물론 그 선택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직업이라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소 거북한 이야기쯤은 감수해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관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과 거짓,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비뚤어진 가치관을 당신은 가급적 피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상황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해양학 수업을 들을지 말지 고민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기후변화라는 거 순 새빨간 거짓말이야. 이 수업도 기후변화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로 가득할 테니, 이런 걸 듣는 건 아마도 나한테 시간 낭비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독단적이다, 사실보다 이념을 앞세운다, 귀를 닫고 마음도 닫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실을 마주하길 두려워한다는 평가를 받아도 쌉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기후변화를 믿지 않아 과학적 사실에 귀를 닫는 사람과 앞서 소개한 드라마 속 미국식 사고방식에 물들기 싫어서 간첩 활동을 거부한 러시아 간첩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딜레마를 마주하게 됩니다. 즉,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바꿀 수도 있는 선택 앞에서 고민할 때 우리가 판단하는 기준이 다름 아닌 지금 내 가치관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죠. 지금 내 사고방식, 내 가치관을 기준으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실을 입력할지를 결정하다 보면 편견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현재 가치관을 토대로 무언가를 선별해 받아들이려는 자세 자체가 독단적이고 폐쇄적일 수도 있는 겁니다. 어떤 사실이 명백한 진실이라도 지금 내 사고방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손해 보는 건 편견에 갇힌 나 자신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자기가 정한 기준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야말로 완전하게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당한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겁니다. 어디까지 내 기존의 사고방식을 내세워야 독단과 아집이 아닌 걸까요? 또 내 사고방식을 내세우는 것이 문제라면 그 대신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을까요?
이 딜레마를 피하는 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늘 합리적인 근거를 토대로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그럴싸한 가정을 버리면 됩니다. 그 합리적인 근거라는 것이 실은 그저 내게 익숙하고 편한 관행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일상 속 상황을 한 번 예로 들어봅시다.
당신은 슈퍼에 가서 우유를 살 생각입니다. 오늘 슈퍼는 당연히 문을 여는 날입니다. 그런데 실은 오늘이 공휴일이었고, 슈퍼는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신은 슈퍼까지 가서야 오늘이 공휴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탕을 치고 돌아옵니다. 실수는 했더라도 당신의 사고 과정과 행동은 원칙적으로 별문제가 없습니다. 문을 열었을 줄 알고 슈퍼에 간 거니까요. 실제로 슈퍼가 문을 열었는지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아니라, 돌다리를 두드려보듯 실제로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확인해보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면 허탕 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확인한 뒤 이를 기준으로 삼았어야 하는 거죠. 이 차이를 인지하고 넘어서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러시아 간첩 부부와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의 사례로 돌아가 봅시다. 미국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났다고 노골적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어울려 필요한 정보를 빼내 오라는 지령이 떨어졌습니다. 제닝스는 이 지령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만약 제닝스가 미국 중심주의자를 시대착오적이고 한심한 작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지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지령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생각에 노출됐다가 거기에 물들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제닝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판단을 내리는 데 어느 정도 중요했던 러시아 간첩의 사례와 달리 기후변화 문제는 다릅니다. 기후변화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믿는 그 사람의 생각 자체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가 거짓말이라는 독선에 기대 수업을 듣지 않는 건 결국 그 독선과 편견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일입니다. 공휴일에 슈퍼에 갔다가 허탕 치고 돌아오는 사람이 받은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실을 외면한 대가는 클 겁니다. 여기서야말로 그가 기후변화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기후변화가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한 과학적 근거와 사실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지금 내 생각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더라도 어떤 경우는 독선과 편견의 틀에 갇힌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지 그 차이를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사람은 반대하고 꺼리는 대상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리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독선과 편견에 갇힌 사람은 어떤 대상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어떤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과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죠.
독선과 편견에 빠진 사람이 이를 박차고 나오기 어려운 이유는 그 사람은 자기가 잘못 알고 있는 것조차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거짓말이다, 지구의 나이는 1만 년도 안 됐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걸러내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바가 사실이라고 단정 짓고 어떠한 토론도 용납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이 글을 통해 함께 살펴봤듯이 사실 독선과 합리적인 선택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우리의 가치관을 돌아보며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과학적 사실인지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Aeon, John Schwenk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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