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형 프로토콜을 되살리자는 주장을 가장 설득력 있게 펴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후안 베넷입니다. 베넷은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로그래머로 현재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교외의 방 3개 딸린 아파트에 여자친구, 또 다른 프로그래머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집에는 원래 사는 사람 말고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데, 손님 가운데 베넷이 세운 프로토콜 랩스라는 단체 관계자들도 많습니다. 포근했던 9월 어느 날, 베넷은 자기 집 현관문에서 반갑게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프로토콜 랩스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집안을 보니 곧 HBO 드라마 <실리콘 밸리>에 나오는 동아리방 겸 클럽하우스 겸 작업실이 떠올랐습니다. 거실에는 검정 컴퓨터 모니터가 죽 늘어서 있고, 방으로 가는 복도 곁 화이트보드에는 누군가 “어서 오세요! 여기는 리븐델(Rivendell)입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들이 사는 도시의 이름이 리븐델이었죠. “저희는 이 집을 리븐델이라고 불러요. 최고의 리븐델이라고 부르긴 어렵겠죠. 여기는 책도, 폭포도, 엘프도 많이 없으니까요.” 베넷이 순진한 어투로 말했습니다.
29살 베넷은 자신을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아주 잠깐 번성했던 “P2P 혁명”이 낳은 세대로 생각합니다. 당시 여러 동영상과 파일들을 대개 불법으로 공유하고 주고받은 비트토렌트(BitTorrent) 같은 네트워크들이 P2P의 인기를 주도했죠. 이 독특한 시기는 바로 탈중앙화를 강조한 인터넷 1층의 개방형 프로토콜이 잠시나마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어떤 문서와 파일을 실제 사람들이 사용하는 네트워크에 직접 올리고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입니다. 비트토렌트나 스카이프는 그 기본적인 신뢰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일반 이용자들이 인터넷에 새로운 기능을 직접 추가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습니다. 비트토렌트 이용자들은 (대부분 불법 복제된 파일이었지만) 수많은 동영상과 파일을 공유했고, 스카이프 이용자들은 인터넷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다른 사람과 통화했습니다.
리븐델의 거실이자 사무실에 앉아서 베넷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카이프와 비트토렌트라는 갓 태어난 서비스가 빠르게 떠오르던 2000년대 초반 시기는 뜨거웠던 P2P의 여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사람들이 좀 더 중앙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구조를 선호하기 시작하자 P2P는 난관에 부딪혔죠. 게다가 P2P 비즈니스를 지탱하는 기둥 가운데 하나가 해적판, 불법 복제였다는 것도 분명한 약점이었고요.”
스탠포드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베넷은 말투가 어딘가 일론 머스크를 닮았습니다. 말을 할 때면 듣는 사람의 머리 위에 허공을 뚫어지라 쳐다보곤 하죠. 마치 허공에 대본을 띄워놓고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프로토콜 랩스가 개발하고 있는 기술에 관해서는 특히나 열정적으로 말하지만, 항상 넓은 맥락에서 큰 그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는 분권화된 시스템에서 중앙 관리자가 통제권을 갖는 시스템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 분석합니다.
“게임의 룰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이 모든 기술 영역을 관통하는 규칙이 사실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지금 우리가 세우는 뼈대 하나, 혹은 어떤 구조라는 것이 5~10년 뒤에는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 분수령으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P2P 방식이 정말 특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분권화된 시스템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몰랐죠. 그래서 제가 그렇게 P2P를 지지한다면 그 방식과 철학이 사라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베넷은 그때 못다 한 지킴이 역할을 하려고 프로토콜 랩스를 창업했습니다. 프로토콜 랩스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인터넷에서 파일을 관리하는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웹페이지 주소를 입력해 웹상에 해당 페이지를 찾아가는 기본적인 과정도 포함됩니다. 베넷은 자신의 시스템을 IPFS라고 부릅니다. 행성 간 파일 시스템(InterPlanetary File System)의 약자입니다. 현재 웹페이지 주소 프로토콜 HTTP는 한 번에 한 곳에서 웹페이지를 불러오는 형식으로, 온라인 페이지 자체를 따로 저장해두는 기능은 기본 설정에 없습니다. 반면에 IPFS는 이용자들이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웹페이지를 불러올 수 있고, 프로그래머들이 쓰는 용어를 빌리면 “과거 기록(historic versioning)”을 남겨둡니다. 그래서 한 번 방문했던 페이지 기록이 프로토콜에 사라지지 않고 남습니다. 베넷은 IPFS 프로토콜을 지원하기 위해 파일코인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용자들은 남는 하드드라이브 공간을 빌리고 빌려줄 수 있는데, 여기에 쓰이는 결제 수단이 바로 파일코인입니다. 데이터 전용 에어비앤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재 지구상에 아무 데도 쓰이지 않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데 쓰이는 하드드라이브 유휴 공간만 해도 엄청날 겁니다. 그런 하드드라이브를 그냥 두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도 손해를 보는 셈이죠. 그래서 이 남는 공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온라인에 매칭 플랫폼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많이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프로토콜 랩스의 최종 목표는 IPFS 프로젝트보다 훨씬 원대합니다. 베넷은 앞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오픈소스 프로토콜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데 헌신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인터넷은 어쩌다 개방을 지향하던 철학을 버리고 폐쇄형으로 변해간 걸까요? 먼저 처음부터 중요한 요인을 간과한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세대 프로그래머와 개발자들이 등장해 본격적으로 인터넷 1층에서 발생한 문제 가운데 풀리지 않은 숙제들을 해결하려 하던 때 즈음 시장에는 자본이 대단히 풍족했습니다. 단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돈을 투자하는 이들은 조건을 붙였죠. 이 작업을 모두에게 공개하지 않고 일단 우리만 알 수 있도록 폐쇄적으로 진행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사실 인터넷 1층의 개방형 프로토콜이 큰 성공을 거둘 때만 해도 온라인 네트워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대기업이나 벤처캐피털리스트의 눈에 띄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몰래 개발을 계속해 필요한 이용자를 확보하고 기준을 정할 수 있었죠. 프로토콜이 개발된 시점과 당시 환경이 성공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셈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페이스북 같은 앞길이 창창한 스타트업들은 이제 갓 서비스를 출시하고도 큰 성공을 거둘지 모른다는 기대만으로 수백만 달러 정도는 쉽사리 투자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민간 분야에서 투자하는 기업은 당연히 투자하는 회사에 주요 소프트웨어 기술에 저작권을 달고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꽁꽁 싸매두도록 합니다.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주주자본주의가 인터넷 분야를 장악한 겁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리스트 크리스 딕슨의 말처럼 경제적인 구조와 상관없이 기술적인 요인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결과가 나온 것도 사실입니다. 안데르센 호로비츠의 제너럴 파트너인 딕슨은 뉴욕에 있는 사무실 회의실에 앉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개방형 트위터를 만든다고 해봅시다. 제 트위터 아이디는 @cdixon인데, 이 사실을 어디에 저장해 두려면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야 하겠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회사들은 이용자들의 행동, 좋아요, 사진, 지도, 위치 정보와 네트워크상에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용자 정보들을 회사가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합니다. 당신이 페이스북에 접속해 올라오는 글들을 볼 때 당신에게는 전체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당신과 관련 있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페이스북의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건 상상도 못 할 만큼 복잡한 일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수백, 수천 개 서버가 주고받는 데이터를 관리하는 일이다 보니,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한 엔지니어들이 이 일을 맡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페이스북은 스스로 인류에게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 페이스북 덕분에 지구상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을 친구 관계, 팔로잉 관계 등에 따라 같은 원칙을 적용해 소셜 그래프(social graph)로 표현하고 연결할 수 있게 됐죠. 하지만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내려면 광고를 팔아야만 하는 사실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페이스북이 어마어마하게 큰 서비스로 성장하면서 20억 명 넘는 사람들의 일상은 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귀결이면서도 심각한 문제를 낳습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수십, 수백만 명의 관계망을 데이터로 전환해 관리하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단일 기업이나 하나의 기관에 맡기는 것이 일리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어쨌든 20억 명의 데이터를 한 회사가 관리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이제 베넷을 비롯해 블록체인을 신봉하는 이들은 시대가 바뀌고 상황도 훨씬 엄중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새로운 대책을 세울 때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거대 권력이 된 테크 기업들이 이용자 수십억 명을 거느리고 어마어마한 자본으로 무장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기본 프로토콜 단계에서부터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쓰는 인터넷이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에 어떻게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넘어야 할 벽이 많습니다. 특히 이미 현재 시스템에 잘 적응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개방형 프로토콜과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환경을 새로운 대안으로 들이밀며 지지를 호소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과는 기본 골격 구조부터 다른 새로운 인터넷을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급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쓰는 인터넷을 좋든 싫든 계속 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으로서 가장 희망적인 시나리오는 정부가 개입해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테크 기업의 지나치게 비대한 권력을 줄이도록 규제하거나 소비자들의 대대적인 각성이 일어나 헤게모니를 장악한 거대 기업의 서비스를 멀리하는 상황입니다. 후자는 대기업형 농업, 식품 회사를 멀리하고 우리 지역에서 농부가 정성 들여 재배한 우리 농산물을 애용하는 운동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인터넷 2층의 속성 자체가 아예 뒤집히지는 않을 겁니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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