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너무 끔찍할 때 우리는 현실을 부정합니다. 보기가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가 괴롭기 때문이죠. 정신 건강 전문가들에 따르면 부정은 가장 흔한 방어기제입니다. 우리는 현실 부정을 통해 자신의 우월감을 유지하기도 하고 사회의 인종차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부정은 미국이 세계 각 지의 “똥구덩이 국가”들로부터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요. 트럼프 대통령의 리버럴한 정적들의 마인드도 크게 다를바가 없을 겁니다. “개발도상국”과 같은 단어로 돌려서 표현하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부정”으로 미국 사회를 통합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인종차별적 발언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그 자신은 더 강하게 인종주의자 혐의를 부인하고 정적들은 자기 속에 내재된 인종주의를 부인하며 트럼프에게 낙인을 찍기에 바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주의는 곧 미국의 인종주의입니다. 그의 추한 면에 대한 인식은 곧 우리 자신의 추한 면에 대한 자각입니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미국인들의 신조는 정당, 이념, 피부색, 지역을 가리지 않죠.
문제가 된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던 자리에 동석했던 민주당 소속의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리처드 더빈은 해당 발언이 “혐오로 가득찬 인종주의적 발언이었다”며 “백악관 역사 상 그 어떤 대통령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트럼프의 인종주의가 특출나게 나쁜 것인 것처럼, 그의 발언이 특별히 잔인했던 것처럼 강조하는 과정에서 더빈 의원은 미국의 전형적인 자기 부정 마인드를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백악관에서 노예를 부렸던 여덟 명의 대통령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링컨 대통령조차도 흑인들이 노예 신세를 면해도 백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날은 멀고 멀었으며 백인과 흑인은 분리되는 것이 서로에게 낫다며 백악관을 방문한 흑인 손님들에게 미국을 떠나라고 권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대통령의 발언에 지금 우리가 분노하듯 분노한 사람이 있었죠. 노예 폐지론자 로이드 개리슨은 “이보다 더 멍청하고 어리석고 비논리적이며 무례하고 시기적으로 부적절한 말이 또 있단 말인가?”라며, “애초에 백인들의 탐욕이 아니었다면 흑인들은 이 대륙에 올 일도 없었다”고 대통령의 발언을 비난했습니다.
그 밖에도 백악관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는 사회진화론의 지지자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KKK 미화 영화 “국가의 탄생”을 칭송했던 우드로우 윌슨이 있습니다. 인종 문제에 있어 미국 사회의 진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린든 존슨마저도 흑인에 대한 멸칭인 “니거(nigger)”라는 단어를 밥 먹듯 썼던 인물이죠.
이렇듯 인종주의의 핵심은 바로 부정입니다. 인종차별적 정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는 그 정책이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이 반드시 존재하죠. 그와 같은 부정의 양상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저도 뉴욕 퀸즈의 인종차별에 대한 부정 속에서 자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지만, 그가 피해 다녔을 험한 동네, 그가 무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과 함께였죠. 학교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우리는 미국의 이상이 평등이라고 배우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삶을 칭송했고, 동시에 흑인은 신체와 정신 모든 면에 있어서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말했던 노예 소유주가 쓴 독립선언서의 글귀(“모든 이는 평등하게 태어났다”)를 읊으며 자랐죠.
토머스 제퍼슨은 평등의 아버지와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오히려 부정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정신은 오늘날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대통령의 인종관이 특출나게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충실하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50년 전, 리처드 닉슨은 이 부정의 정신을 정치 철학으로 한 차원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조지 월리스 류의 인종분리주의자들에게 어필하면서, 동시에 “위험한 흑인들”과 이웃으로 지내기를 거부하고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반대하며 흑인 가정을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하고 흑인들의 문화를 비하하면서도 스스로를 꿈에도 인종주의자라고 여기지 않았던 미국의 수많은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백악관에 입성했죠.
닉슨 캠프의 한 고문은 잠재적인 지지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종주의적 어필에 끌리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거 전략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종주의를 부인하기 위한 새로운 어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법과 질서”, “마약과의 전쟁”, “모범적인 소수자”, “역차별”, “인종중립적”, “개인의 책임”, “흑인에 의한 흑인 대상 범죄”, “불법 이민자”, “오바마케어”, “경찰의 목숨도 중요하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 “권리 의식”, “부정 투표” 등 다양한 표현들이 이에 해당하죠.
이와 같은 부정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보수 뿐이 아닙니다. 흑인들이 불안정한 가정 및 범죄 문화의 악순환 속에 갇혀있고 빈곤과 차별이 나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고 믿는 백인 리버럴들도 자신의 인종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이런 어휘를 사용하곤 하죠.
트럼프는 멕시코인들을 범죄자, 강간범으로 낙인찍으며 인종차별로 대선전의 막을 열었습니다. 당선 후에도 폭력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매우 괜찮은 사람들”로 부르거나, 나이지리아인을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로 칭하는 등 수많은 어록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근거를 들이대도, 트럼프 대통령은 끊임없이 이를 부인합니다. “내가 당신이 만나본 사람 중 인종주의자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라면서요.
추한 부정의 말들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척점에 서있으면서도 자신의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저는 더 큰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자신들의 공격은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엘리트계에 비백인이 별로 없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부정하곤 하죠.
마틴 루터 킹 목사 역시 1963년 버밍햄 교도소에 앉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얄팍한 이해가 악의를 가진 사람들의 절대적인 오해보다 훨씬 더 큰 좌절감을 준다”고 적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무덤에 가는 순간까지 자신이 악이적인 인종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럼프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추악함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종차별로 얼룩진 현실을 외면한 채, 나 자신, 우리 사회에 대해 아름다운 환상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부정이라는 무기로, 현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인종주의자에게 찍히는 낙인은 이와 같은 부정의 정신을 더욱 부추깁니다. “인종주의자”가 하나의 정체성이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이러한 낙인 효과를 강화하죠.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인종주의자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나 하는 행동이 인종주의적인 것이죠. “인종주의자”는 “인종주의자 아님”과 같이 고정된 어떤 카테고리가 아닙니다.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인종주의자들 뿐입니다. 인종주의의 핵심이 부정의 정신이라면, 반(反)인종주의의 핵심은 고백의 정신일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매우 찾기 힘든 부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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