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펜실베니아주 스크랜튼(Scranton)은 석탄 산지로 미국 산업혁명 시기 경제가 흥했던 곳이지만, 20세기 초부터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1902년, 지역 경제를 떠받치던 철강 회사가 스크랜튼을 떠난 뒤 1920년대에는 단추 제조업체가 성업하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석탄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1959년 탄층(炭層)을 찾아 땅속을 파던 중 서스케하나강 바닥을 건드리는 바람에 강물이 갱도로 흘러들었고, 탄광은 그대로 문을 닫게 됩니다.
2012년 스크랜튼시는 파산 직전까지 갔습니다. 20세기 내내 경기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던 지역이라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주민 5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진척된 디지털 중심 경제에서 뒤처져 경제적으로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런 지역이나 도시는 스크랜튼 말고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지역 경제를 살려보려고 주 정부, 지방 정부를 동원해 수많은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인프라 정비 및 확충에 이어 각종 재개발 계획이 수립되고 집행됐습니다. 영국의 티스강 하류 주변 공업지역을 일컫는 티스사이드(Teessdie), 프랑스의 빠드깔레(Pas-de-Calais) 지역도 비슷합니다. 펜실베니아주는 2007~2016년 기업에 보조금으로만 60억 달러를 썼습니다. 미국에서 이 기간 동안 펜실베니아보다 많은 보조금을 쓴 주는 없다고 합니다. 보조금 대부분이 주의 북동부 지역에 집중됐지만, 그 효과를 둘러싼 평가는 후하지 않습니다.
지역 간 격차가 생기고 그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원인 가운데는 세계화로 인한 구조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이는 한 지역 차원에서 거스르거나 흐름을 바꾸기 힘든 일이죠. 물론 세계화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차단하거나 억제할 수도 있습니다. 펜실베니아 북동부 지역의 유권자들은 바로 그 점에 희망을 걸고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줬고, 트럼프는 그 덕분에 (애초 예상을 뒤엎고) 20명이나 되는 펜실베니아의 선거인단을 클린턴에게서 빼앗아올 수 있었습니다. 영국 티스사이드 지역 유권자들이 브렉시트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진 이유도, 프랑스 빠드깔레 지역 유권자들이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를 열성적으로 지지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세계화의 흐름을 어떻게든 막아선다고 몰락한 지역 경제가 알아서 되살아나는 건 물론 아닙니다.
한때 경제학자들은 지역 간 격차나 국가 간 불평등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부유한 지역에서 투자할 기회를 찾지 못한 돈은 자연히 지금은 부유하지 않지만 잠재력이 있는 지역으로 흘러들어올 것이고, 기술의 발전은 결국 널리 퍼져 모두가 혜택을 공유하게 되리라는 가정에 바탕을 둔 전망이었습니다. 실제로 20세기에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산업화한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훨씬 빨리 경제를 회복했고, 앞서 나가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았습니다. 예를 들어 1950년 이탈리아의 1인당 생산력은 미국의 33%에 불과했지만, 1973년이 되면 62%까지 높아집니다. 1880~1980년 미국 주들의 1인당 소득 격차는 매년 1.8%씩 좁혀졌습니다. 100년 사이 플로리다 사람들의 1인당 실질소득은 코네티컷 사람들의 33%밖에 되지 않던 수준에서 82%로 높아졌습니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같은 기간 국가 내부에서, 또 국가마다 존재하는 지리적 차이가 점점 덜 중요해지면서 선진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경제 격차는 오히려 넓어졌습니다. 1870년 미국인의 소득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소득보다 (생활 물가를 반영하고) 9배 정도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이 수치는 1990년이 되면 50배 이상으로 높아집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흐름이 분명히 바뀝니다. 한 국가 내에서의 지역 간 격차는 커지고, 반대로 가난한 나라들이 앞서 산업화를 이룩했던 선진국들을 경제적으로 따라잡는 속도는 빨라졌습니다.
1880~1980년과 비교했을 때 1990~2010년 미국에서 주별 격차가 좁혀지는 속도는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지금은 주별 격차가 더는 좁아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생산성 향상을 기준으로 보면 부유한 도시가 다시 보통 혹은 가난한 지역과의 생산성 격차를 벌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OECD 최근 보고서를 보면 회원국 내 부유한 상위 10% 지역과 하위 75% 지역 사이의 평균 생산성 격차는 지난 20년간 60% 가까이 벌어졌습니다.
잘 사는 나라 안에서 지역 간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과 가난한 나라가 선진국을 따라잡는 현상은 서로 연관돼 있습니다. 또한, 기술 발전과 정치적 변화를 토대로 앞서 예측됐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선진국 정부나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일 뿐입니다.
저임금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가 부유한 나라와 무역을 하면 자연히 두 나라 숙련노동자의 임금은 비슷해집니다.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 임금은 오르고, 반대로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 임금은 낮아지죠. 세계화가 몰고 온 충격파는 특히 몇몇 지역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는데, 무역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던 노동자들이 비슷한 곳에 모여 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화의 추세와 흐름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던 지방 정부와 지역 정부가 그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기업은 한데 모여 있을 때 시너지 효과를 냅니다. 특히 제조업이 그런데 원자재를 한꺼번에 공급받아 단가를 낮출 수도 있고, 소비자와 가까운 데 모여있는 혜택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공장이 모여있는 곳에서 돈이 돌고 지역 경제가 그에 맞춰 번영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뉴욕의 금융업이나 실리콘밸리의 IT 업계를 보면 이는 비단 제조업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 업종이 모여있는 경제 클러스터의 규모는 결국 전체 경제력에 비례하는데, 세계화와 함께 무역이 늘어나면서 경쟁력이 높은 클러스터는 비교우위를 이용해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런던은 세계 금융의 허브로 자리매김했고, 파리의 인터넷 기업은 캘리포니아의 인터넷 기업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1등이 아닌 클러스터에 있는 기업들에는 심하게 말하면 특화해서 살아남거나 그대로 주저앉는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무역은 제로섬게임이 아닙니다. 생산 과정에서 효율성이 높아지면 그로 인해 생산성이 오릅니다. 소비자들은 더 좋은 품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더 싼 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되죠. 하지만 생산이 지역적으로 한 곳에 집중되는 현상이 두드러질 겁니다.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맞춰 돌아가던 지역 경제는 공동화 현상으로 인한 침체를 피하기 어려워집니다. 돈도, 유능한 인재도 잘 나가는 도시로 모여들면 기업도 그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몇십 년간 미국 주요 도시 지역의 생산성은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생산력 집중 현상은 미국의 여덟 개 주요 IT 허브 지역에 몰리는 핵심 인재들과 그들의 높은 연봉이나 런던이 영국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높아지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승자독식까지는 아니지만, 승자가 훨씬 많은 전리품을 가져가는 구조에서 그렇다면 전통적인, 가난한 지역은 왜 세계화의 추세를 기민하게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지게 된 걸까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예전보다 기술이 더 쉽게 퍼지게 됐습니다. 지역적 요인이 더 이상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기도 한데, 2015년 OECD에서 발표한 연구를 보면 2001년 이후로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발표하고 이를 토대로 서비스를 출시하면 다른 나라의 주요 기업들이 이 기술을 받아들이고 따라잡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습니다.
나라별 격차는 좁아졌지만, 한 나라 안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됩니다. 한 나라의 선도 기업이 내놓은 기술을 그 나라의 후발 기업이나 지역이 따라잡는 속도는 오히려 느려진 겁니다. 해당 보고서의 저자들은 선도 기업이 세계 시장의 기준에 맞춰 내놓은 새로운 기술을 지역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이 굳이 빨리 배워야 할 이유가 없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세계 시장과 지역 시장의 격차가 이른바 선도 기업과 후발 기업들 사이에 이원화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세계 시장이 갈수록 통합되면서 한 분야의 최고 기업이 사실상 전 세계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리면 유능한 인재도, 투자도, 수익도, 이윤도 모두 그 기업으로만 몰리게 됩니다. 지역 경제에 유입되는 자원은 갈수록 말라갑니다.
이렇게 자원과 기회가 몇몇 지역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기회를 찾아 그곳으로 모여듭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현상이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개발도상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2010년 상하이 인구는 30년 전보다 두 배 늘어났습니다. 1841년 맨체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과거 세대보다 새로 부상하는 곳으로 이주하는 걸 꺼립니다. 쉽게 사는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더 많아지기도 했고요. 원래 미국은 분명 사람들의 지리적 이동도 무척 활발한 편에 속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동성은 눈에 띄게 줄어 매년 미국 안에서 다른 주로 이사하는 미국인은 전체 미국인의 2% 정도에 불과합니다. 유럽의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1.5%로, 그래도 여전히 미국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이사하기는 합니다.
성공적인 경제 클러스터가 유능한 인재를 빨아들이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데 저항하는 힘, 혹은 걸림돌도 있습니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는 걸 반기지 않는 해당 지역 사람들이 주택을 새로 더 짓지 못하게 반대해 집값이 너무 비싸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100년 전에는 이런 식의 걸림돌은 없었죠. 임금이 높아도 집값이 워낙 비싸 생활은 더 팍팍해지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동시에 복지국가 제도의 기틀이 닦이면서 사회 안전망이 더 튼튼해져 굳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날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지역 경제는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고, 내 상황도 녹록지 않다지만, 그래도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 겁니다. 19세기 캘리포니아의 광산촌이었던 보디(Bodie)는 한때 지역 신문사에 기차역도 있던 잘 나가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산이 문을 닫은 뒤 말 그대로 완전한 유령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오늘날은 정부 보조금이나 연금 등이 있어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하루아침에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일은 잘 없습니다. 게다가 도시로 가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비싼 집값을 비롯해 각종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물가가 훨씬 낮은 소도시나 시골의 상대적인 장점이 되었습니다. 공무원이나 공공부문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각종 혜택이 자주 거주지를 옮기는 이에게 불리하게 돼 있는 것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원래 살던 곳에 있는 가족, 친구를 등지고 새로운 곳으로 가기 힘들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코노미스트)
참고 기사: Globalisation has marginalised many regions in the rich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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